관람일 : 2011년 11월 22일
공연장 : 명동예술극장



SNS 바이럴 마케팅에 넘어간 걸까. (공연을 보기 전에 한 문장 쓰고, 공연을 보고 나왔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가슴이 너무 벅차서 <꽃미남 라면가게 7화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다. 지금, 바로 지금 적어 내려가지 않으면 또 이 마음이 무뎌질까봐. 결론은 엄청 좋았다는 것.) 사실 <오이디푸스>가 별로 보고 싶던 공연은 아니었다. 일단 신화와 고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해하기에 식견이 짧은 탓이다. 게다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어찌 되었던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도 흥미를 끌지 못하는 한 요소였다. 근데 그 놈의 리트윗! 리트윗! 리트윗! 

 

아침에 눈 뜨면, 버스에서, 잠들기 전에, 할 꺼 없으면 만날 들여다보는 게 트위터인데, 그놈의 <오이디푸스> 리뷰가 리트윗으로 얼마나 많이 올라오던지. 그것도 호평에 호평만. 물론 관계자가 리트윗하는 것이니 당연지사 좋은 평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공연이기에 이렇게 평이 좋은 걸까. 게다가 올해 명동예술극장에서 본 공연이 나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고. 결국 리트윗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어디 한 번 볼까?" 하는 마음으로 인터파크 티켓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왠걸! 이번 주 일요일이 막공인데 모든 날짜가 예매불가였다. "매진? 아니면 오류야?" 하면서 생기는 도전의지. 결국은 명동예술극장 사이트까지 가서 예매를 하고 말았다. 사람 마음이 너무 간사한 게 오늘도 와서 보니 대기자 명단이 사람들 이름이 쫙 써져 있는데, 그냥 내가 막 대견하고 기특하고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무대는 꽤나 단순했다. 객석을 마주보고 언덕처럼 되어 있는 삼각형 무대는 경사져 있었고, 오른쪽에는 벽이 있었다. 쇠파이프(?)가 튀어 나와있는. 검은 색 무대. 그 외에 특별한 무대장치가 없었다. 혼자 멍하니 있다 뒤에 앉은 남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얼핏 엿들었다. 아니, 그냥 들렸다.  "배우들은 어디서 등장해? 왜 양 옆에 드나드는 문이 없어?"  "아니, 알아서들 하겠지."   "걱정돼서."  그들의 대화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은 이 공연을 어떻게 볼까 궁금해졌다. 암전이 되기 전 무대 왼쪽에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개의 국악기가 놓여 있었다. 요즘 이렇게 실제로 연주를 하거나 무대 전환시 BGM 등을 실제 노래로 하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오늘이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던 듯. 정말 멋있었다.   

 

그런데 오늘 공연에서는 멋있는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그 벽에 시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연기, 그들의 몸짓, 그들의 대사, 그들의 호흡, 앙상블. 정말 멋있었다. 그 벽 파이프 몇 개에 의존해 걸터앉거나 아예 걸려 있거나 엄청 힘들 자세에도 디테일 넘치는 모습에 어느 누구한테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노래도 아니면서 오이디푸스를 부르거나 떼창을 할 때 그 하모니. 누구 하나 어긋나거나 튀는 사람 없이 몹시 조화로웠다. 

 

아쉬웠던 것은 내 자리가 오른쪽이어서 오른쪽 벽에 있는 그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거. 그리고 어쨌든 그들은 왼쪽을 향해 있기 때문에 소리의 감이 좀 멀게 들렸다는 거. 이 공연은 진심 중앙이나 왼쪽에서 봐야 할 듯. 오늘 가장 슬픈 부분이었다. 내 자리.  절대 오른쪽은 피해야 한다. 마지막에 그 벽 한 가운데에서 크레온이 등장하는데, 그 것도 하나도 안 보였다. 젠장.

 

시민 중 시인 역할을 하신 분이 있었는데 말투하며 호흡하며 너무 좋았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 한 번은 그 분의 연기를 본 적이 있을 것만 같았다. 뭔지는 명확하게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분의 연기 스타일이 너무 좋았다. 약간 화자의 역할(?), 변사의 역할(?)을 하는 듯 하는데 무거울 수 있는 극에 유연함을 주면서 장면과 장면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나중에 나와서 프로그램 북을 보며 제일 먼저 그 분을 찾아봤는데 김은석. 그리고 눈에 띄는 세 글자, <다락방>. 그 분이 거기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연기 스타일이 대한 기호이자 개인의 취향인 듯싶다. 그 분 위에 <주인이 오셨다>에 출연하셨다는 배우 분의 프로필도 보았는데, <오이디푸스>에서 연기를 잘 하신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디서 봤다는 생각은 못했다.)  - 다시 한번 김은석 님을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돍날>에도 나오셨다. 이제 명확하게 기억이 난다. 그 분이 어떤 분이셨는지. 하하하. -

 

사실 주인공이나 중요 배우들에 대해서도, 극 자체에 대해서도, 무대나 연출에도 대해서도 할 말이 너무너무 많은데,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으나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림을 그리신 분도 그렇지만 춤 추시던 분. 커튼콜을 할 때 따로 인사를 하시는 걸 보니 아마도 무용을 하시는 분 같다. 나는 진짜 연극배우(사실 이런 걸 구분하는 게 무의미하기는 하지만)인 줄 알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정말 그 몸짓은 정말 멋있었다. 특히 그 벽 가장 위에서 내려오실 때. 그리고 특히 예언자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인간인지 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그것을 연기하신 분. 솔직히 말해서, 나는 오늘 가장 인상 깊은 배역, 혹은 배우, 혹은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 분을 뽑을 것이다. 어느 배우 하나 모나는 부분 없이 훌륭했지만 (솔직하게 어떤 한 분이 극에 동화되지 못하고 조금 겉돌고 있는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극이 너무 좋았던 관계로, 한 분 정도야 그냥 모두 잘했다라고 말을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한 분도 개인적으로 놓고 봤을 때는 부족함은 없으셨다.) 정말 그 분의 몸짓하며, 새 소리는 뭐라고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디테일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오이디푸스>는 첫 장면인 벽을 타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도 인상 깊었지만, 아무래도 몰입도가 생기는 장면은 오이디푸스와 눈 먼 예언자가 만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박정자 배우님의 연기도 너무나 훌륭했는데, 뭐 배우들에 대해 자꾸 말하자니 타자를 치는 내 손가락이 아플 터. 물에 오이디푸스의 얼굴을 비추는 장면이 무대 뒤 배경에 생긴 그림자와 함께 더욱 임팩트 있게 다가왔다. 음향이나 노래 소리도 그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 시켜주었다. 나중에 새가 벽으로 올라가고 바닥에 뚫린 구멍에서 조명이 나와 그 새를 비춰주는 장면도 머릿속에서 쉽게 잊혀지지는 않을 것 같다.

 

배우들이 객석에서 등장을 하는 것도 좋았는데, 특히 양치기가 등장하는 장면은 웃음 포인트가 되어서 자칫 무거울 수 있는 극의 분위기를 완화시켜주었다. 어찌나 능글맞게 연기를 잘하시던지. (, 배우 분들에 대한 칭찬은 여기서 그만해야겠다. 정말 글을 끝낼 수 없을 듯) 그리고 소소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손바닥에다 가루를 묻혀서 스모그나 안개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준 연출도 좋았고, 시민 역할을 하던 배우들이 얼굴에 천을 뒤집어 쓰고 돌을 던지던 연출도 좋았다. 질서정연하면서도 혼란스러운 그 모습. 얼마나 디테일한 부분까지 연출되었는지, 그리고 배우들의 합이 얼마나 좋은지 느낄 수 있었다.

 

극은 이야기 상으로도 그렇고, 연출상으로도 그렇고 뒤로 갈수록 더 흡입력을 얻는 것 같다. 뻔히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결론을 알고 있음에도 긴장감을 멈출 수가 없다. 솔직히 오이디푸스가 두 눈을 잃는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했었는데, 깜짝 놀랐다. 그의 고통과 슬픔이 극대화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단지 색으로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질감을 살렸다는 점도 좋았다. 그 깨진 조각들을 밟고 걷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더 서글프고 안타까웠으니까. 마지막에 바닥에 흰 색으로 사람 모양을 그리는 것도 꽤나 인상 깊었다. (여기서 한 가지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마지막에 오이디푸스의 독백은 마이크 에코(?)를 뺐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녹음한 건 줄 알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녹음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약간 몽환적이거나 다른 느낌을 주기 위해 마이크의 에코를 사용한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으로 조금은 그 분위기에 방해를 받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나는 <오이디푸스>가 이렇게 슬픈 이야기인지도 몰랐고, 이렇게 비극적인 이야기인지도 몰랐고,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인줄도 몰랐다. 워낙 신화나 고전에 관심이 없는 인간인지라,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트윗에서 번안극이라서 조금 어려웠다는 글도 본 지라 약간은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 조금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지루할 틈이 없었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연극이었다. 인간의 이성과 지혜, 그리고 신이 정해주신 운명의 대립. 그 이야기도 좋았지만 신화 속 그들이 현대의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오이디푸스가 파멸한 이유는 신탁, 그 이유 하나뿐이었을까. 자신의 앞날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아닌 거 같다. 물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그를 파멸을 이끈 가장 크나큰 이유이지만 크레온의 마지막 연설이 나는 또 다른 부분을 의미한다고 본다.

 

크레온이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는 장면은 꽤나 이 시대와 닮아 있다. 전통으로 지키겠다고? 이방인을 배척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방인에 대해 배타적인 현실처럼. 그리고 선대의 왕들이 그러하였으니, 이성과 지혜를 믿는 오이디푸스에게 신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그 모습. 그리고 크레온이 이 나라가 자신의 아버지의 피로 세워지고 자신의 누이가 왕비로 있는 자신의 나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인간의 이기를 엿보았다. 나라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크레온이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을 때, 겉으로는 환호를 외치고, 그 뒤에서 냉소를 보이던 시민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재앙의 근원이 오이디푸스임이 밝혀졌을 때, 그에게 보이던 멸시와 비난 사이에서 그를 위로하는 한 여인네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내게도 위로가 되어주었다.

 

공연을 보면서 조금은 눈물이 흘렀던 것 같다. 뭐가 슬픈지는 알 수 없었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도록 신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어 놓았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 아닐까. 하지만 그 가혹한 운명에서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의지를 찾고자 했던 오이디푸스. 그의 몸부림. 그것이 사람의 가는 길. 그 길이 비극일지라도. 꿋꿋하게 걸어나간 그가 많이 아팠고, 많이 슬펐다. 좋은 대사들이 너무 많아서, 그걸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머리가 정말 원망스러웠다. 내 신체에 녹음기 기능이 있어 공연을 보고 나왔을 때는 모든 걸 다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대본을 찾아서 읽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아침이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두컴컴한 아침이다. 칙칙한 회색빛 아침이다. 아, 이미 비가 내리고 있는, 그래서 온 세상이 찝찝하게 젖어 있는 아침이다.

아침 출근길, 건물과 건물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던 주황빛으로 하늘을 물들이던 해를 볼 수 없는 아침이다.

사람의 정신력이란 무섭다. 정말 아침에 해야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니, 깨우는 알람 소리하나 없이도 눈이 떠진다.

사람의 정신력이란 정말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않고 꿋꿋하게, 평상시에 일어나는 시간을 꾸역꾸역 채운 후에야 몸을 일으킨다.

최근 기상 시간, 7시 40분. 나란 인간 자체가 20분 이상의 준비 시간을 가지면 큰일이 나나보다. 스스로를 꾸미고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더 재밌는 건 나의 알람은 7시 40분에 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왜 울리지 않을까 항상 의아했었는데 오늘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내 알람은 마지막이 7시 30분이니까. 항상 일어나려고 마음 먹은 시간에서 10분을 또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내가 쓸모없이 버리는 시간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조금은 더 열심히 생을 살고 싶었다. 무언가를 하며, 무엇인가에 집중하며 재미있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솔직함을 빙자한 나태함으로 스스로에게만 관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엄격해져야겠다. 임기응변이나 거짓말로 점철된 삶 따위는 살아가고 싶지 않다.

비가 와서 인가 보다. 이토록 말이 많아 지는 것은. 비가 오니까. 비가 온다.

비가 오는 아침이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지껄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친 거 같아.  (0) 2011.12.16
"내가 틀릴 수도 있겠지만."  (0) 2011.12.13
안개 속을 걷다  (0) 2011.10.16
모르겠다, 인생사  (0) 2011.09.28
위험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0) 2011.09.25

 

2년 남짓, 이 동네를 왔다 갔다 했으면서도. 그 중 6개월 남짓한 시간, 일주일에 5일, 하루 2번씩 그곳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오늘에서야 처음 그곳에 발을 디뎠다. 브로드웨이 시네마. 처음엔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서, 괜시리 시설이 낙후할 거라는 추측 때문에 그곳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 중 한 관을 인디플러스에 내준 후, 그곳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하지만 이전의 습관들 때문이었을까. 이상하게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오늘, 스스로에게 어떤 예고도 없이 그곳의 문을 열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딱히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퇴근 후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고는 매일 타던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탈까 생각해 영화관 앞 정류장을 서성였던 것뿐.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런 내가 나도 모르게 어느새 영화관에 들어서 있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일 영화를 보자고 했던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가벼운 약속이 결국 지켜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마지막으로 회사에서 같이 나온 동료가 금요일인데 그냥 집으로 가냐는 아무 것도 아닌 질문을 던졌기 때문일까.

매표소는 브로드웨이 시네마와 인디플러스로 나뉘어져 있었다. 직원이 자리를 비워 텅 빈 인디플러스 쪽으로 다가가 시간표를 봤다. 당장 볼 수 있는 마지막 영화는 <모차르트 타운>이었다. (아! <뽕똘>이 보고 싶어서 들어간 거구나. 그게 이제야 생각이 나다니;;;;)

<모차르트 타운>

어디선가 얼핏 본 제목이었다. 하지만 봤다는 사실만 기억날 뿐, 어디서 봤는지 무얼 봤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옆에 비치된 리플렛을 꺼내 들었다. 우선 깜짝 놀란 건 외국 영화가 아니라 한국 영화였다. (또 얼핏 생각났다. 이 영화는 <나넬 모차르트>와 함께 소개되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당연히 외국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리플렛에 적혀 있는 문구가 내 눈길을 끌었다. 아니, 내 마음을 찔렀다.

-도시 속 외로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다
-모차르트가 남긴 아름다운 유산, 외로운 사람들의 소나타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외로움과 슬픔을 피해 어디로 갈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 난 외로웠다.
그래서 영화관의 문을 연 것이다.
그것이 이유 없다 여긴 갑작스런 영화관 방문의 가장 큰 이유였다.

영화는 생각만큼 잔잔했다. 그리고 덤덤했다. 그 덤덤함이 미칠 것만 같았다. 영화는 교환교수로 한국을 방문해 모차르트를 가르칠 한 외국 여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한 그녀. 하지만 그녀를 스쳐 지나간 이 나라에,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희망도, 설렘도 없었다. 외로움만 가득했을 뿐.

아니, 사랑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의 사랑도 명확하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저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받기 위한 어떠한 순간에, 어떤 사건에, 어떤 행동에, 어떤 사람에 기대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었을까.

<도교 소나타>가 많이 생각났다. 영화에 흐르는 소나타 선율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잔잔하고 담담한, 하지만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불안하고 또 불안한 삶의 연속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한 평 남짓한 노점 가게에서 3년 째 연락 두절인 남편을 기다리며, 아니 원망하며, 아니 미워하며, 아니 사랑하며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던 한 여자. 그리고 당뇨에 걸린 고속버스를 운전하는 반찬투정이 심한 아버지 때문에 문을 닫은 일터에서 중국의 취직 자리를 알선해 줬을 때도 떠날 수 없었던 피아노 조율사. 그는 그녀를 사랑했나? 아니면 그녀와 자고 싶었을 뿐인가. 사랑이라 믿고 싶은 건, 그녀에게 섹스를 거부당하고 난 다음 날에도 그녀에게 다가와 건넨 일상의 대화와 그 환한 미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만남은 채팅이라는 가상의 공간이었을 뿐이지만, 그 공간에서 여자의 답이 없자 “제가 뭘 실수했나요?”라고 묻던 그 소심한 남자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걸 외로움 때문만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를 미치게 만들던 건 이 남자가 아니었다.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나쁜 남자 콤플렉스가 있는 것일까. 일수를 찍고 술집을 경영하고, 작은 방에 혼자 사는 또 다른 남자. 말이 좋아 사장이지, 그냥 건달. 세미 조폭. 새벽에 퇴근하는 그가 새벽에 출근하는 그녀에게 산 담배 한 갑. 남들은 오후인 그의 아침. 그는 팬티만 입은 채 담배 한 대를 태우며 창가에서 그녀의 가게를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녀의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는 취객을 저지하면서 그와 그녀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녀와 데이트도 하고, 결국 불발로 끝났지만 모텔에 간 것은 피아노 조율사인데,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달 아저씨와 그녀가 더 애틋한 것일까.

잔잔한 걸 좋아한다 해도, 나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에 민감한 여자이기 때문인지 여자의 카메라가 떨어지며 세 남녀가 마주칠 때는, 관객이 4명 밖에 안 되던 영화관에서 나 혼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 하고. 피아노 조율사는 여자를 위해 그 카메라를 고치려 전자 상가를 헤매고, 건달 아저씨는 돈을 받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피투성이로 만든 채무자의 손 옆에 있던 카메라를 들고 와 그녀에게 전해준다. 어떤 감정의 표현도 없이. “부담 없이 받아요” “괜찮아요” “그냥 받아요” “괜찮은데” “그냥 써요.” 그 무심한 대화들이 정말 날 미치게 만들었다. 분명 그들의 감정과 마음에는 변화가 있었을 텐데. 그 대화에서는 사소한 설렘도, 떨림도, 미소 조차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게 그냥 나는 그렇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아니 서글펐다. 아니, 모르겠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비단 이 세 명이 아니었다. 처음 그 교환 교수가 서 있을 때, 같은 프레임 안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하고 있던 흑인 남자. 불법 체류자. 단속반이 뜨면 도망가기에 급급하고, 도망에서 돌아온 후에는 사장으로부터 오래 자리를 비웠다고 욕을 먹는다. 목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신에게 기도해도, 목사는 무력하게 사장으로부터 욕을 먹고 쫓겨날 뿐 그 어떤 것도 해주지 못한다. 신은 없다. 장기조차 팔 수 없는 그.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충격적인 결말이, 예상치 못한 그 상황이 견디기가 힘들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는 것일까. 죽은 사람을 향해 거침없이 발길질을 하는 그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그 곁에 떨어진 사진 한 장은 날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떠난다. 교환 교수인 그녀가 이 도시를 만나게 해준 모차르트에게 thanks to를 외치며 떠난다. 3년 간 남편을 기다리던, 외로움에 지쳐가던, 하지만 남편과의 마지막 사진 한 장을 버리지 못했던 노점 가게, 그녀가 떠난다. 남편의 전화 한 통을 받고. 남편이 왜 떠났는지, 그녀는 남편과의 통화 이후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 설명해주지 않은 채, 그저 그녀가 떠난다. 외국인 노동자인 그와 그녀가 떠난다. 사장에게 농락당하고 아이의 사진을 품고 있던 그녀가 흑인 남자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세 여자가 나란히 공항 에스컬레이터에 서 있다.

누군가는 thanks to를 읊조리며 떠난 곳이 누군가에는 악몽 같은 곳이었고, 또 누군가에는 외로움에 사무치는 곳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삶이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자가 있다. 건달 아저씨와 함께 술집을 하는, 마담 급 여자. 형사에게 몸을 대줘야 하고, 건달 아저씨를 좋아하지만 그조차도 표현할 수 없었던. 그래서 남자가 자신을 품지 않은 채 홀로 그의 욕구를 해소할 때, 그 앞에서 벌거벗은 채 절망해야 했던 한 여자. 그리고 노점상 가게 여인이 남자에게 전해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곳을 떠나겠다고 말한 그 여자.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냥 공항을 떠나는 그들의 모습과 ‘땡스 투. 모차르트’라는 내레이션일 줄 알았다. 근데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술집 여자였다. 건달 아저씨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도 담담했던 그녀. (이 영화가 무서운 게 이 점이었다. 모든 게 너무 담담해. 그래서 더 힘들었던 것 같기도) 그랬던 그녀가 술에 잔뜩 취해 먹은 걸 게워내고, 손님들이 있는 홀에서 소변을 본다. 주위 여자들은 미쳤냐고 말하지만 손님 중 한 사람이 그걸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것도 미소 띤 얼굴로.

소변을 보는 장면은 더럽지 않았다. 그 소변 마저 나한테는 눈물로 보였다. 그녀가 안고 있는 설움을, 슬픔을 그렇게 밖에는 배출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슬펐다. 헌데, 그녀를 바라보는 손님의 시선에서 불편해졌다. 결국은 불편한 영화였다고. 절망적인 영화였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 하나도 편해지지 않았다. 물론 에필로그에서 웃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긴 했지만 어쨌든 서글펐다. 너무 담담해서 진실 같고, 사실 같고, 현실 같아서. 그저, 이건 영화잖아, 라고 말할 수만은 없어서. 많이 먹먹해졌다.

영화는 노점 가게에 걸려 있는 사진을 클로즈업 하면서 시작한다. 그래서 사진은 계속 영화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곳곳에 거울을 배치해 그 곳에 인물이 비치게 한다. 그러면 그 거울 역시 하나의 사진이 된다. 사진이라는 프레임이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을 가득 채운다. 뭔가 굳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그 느낌이 참 좋았다. 그냥 ‘삶’이라는 게 그렇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전규환 감독. 내가 이 감독의 이름을 외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그 사람의 3부작 <애니멀 타운>과 <댄스 타운>이 보고 싶어졌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난 날은 뭐랄까. 행복한 기분은 아니지만 오랜 여운을 갖게 되는 것 같다.


 

20111001 / 아트하우스 모모



 

칸 라이언즈 수상작 상영회. 9월이 되면 문득 문득 한번씩 떠오르곤 하는, 이제는 연례 행사가 되어버린 관람이다. 사실, 올해 9월은 너무 정신 없이 흘러갔기 때문에 못 보고 지나칠 줄 알았다. 8월 말쯤, “이제 곧 칸 국제광고제가 하겠구나. 챙겨봐야지.”라고 생각하고, 솔직히 9월에는 잊은 듯 살았다. 그러다, 지난 주 5일까지 상영회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르고 지나치면 더 속상할 뻔 했는데, 이렇게 나에게 기회를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볼 수 있는 시간은 이번 주말뿐. 그 중에서도 오늘 토요일 밖에는.

 

시간표를 살펴보니 올해부터는 이름도 바뀌고, 상영 방법도 바뀌었다. 필름 부문 수상작으로 이뤄지는 A편과 인터넷 필름 및 크래프트 수상작으로 이뤄지는 B편으로 나뉘어 상영되는 것. 솔직히 A B의 명확한 차이도 모르겠고. 고민을 하다가 현장에 가서 결정을 하자 마음 먹었는데, 사실 조금 자신이 없었다. A편 상영이 11시였는데 사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힘들다. 요즘 거의 잠귀신이 씌여서. 어쩌면 알면서도 못 보고 지나가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겠구나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알람 없이 7시에 기상. 결국 영화관으로 향했다. B편은 12 50분에 시작인데 3시에 연극 하나를 예매해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러닝 타임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2 20분에 끝난 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아쉽지만 깔끔하게 포기. 그냥 11시 타임의 A편만 표를 샀다.

 

3년 전, 처음 우연히 칸 국제광고제를 봤을 때 그 짜릿함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을 웃기고 울릴 수 있다는 거. 감동으로 마음을 움직인다는 거. 그 기발하고 거침없는 아이디어. 나는 그렇게 광고에 매료되었다. 어찌 보면 나는 처음부터 광고에 어느 정도 환상이 있었다. 드라마는 드라마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광끼>를 보면서, 광고가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 역할이 주어진다면, 아마도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다 여긴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환상으로만 갖고 있던 광고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게 칸 국제광고제였으니까, 당연히 특별한 의미로 남았을 수밖에 없다.

 

그 다음해 보게 된 칸 국제광고제는 처음만큼 짜릿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는 작품들이 전년도에 비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후 시네큐브의 운영사가 바뀌면서 칸 국제광고제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백두대간의 또 다른 영화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작년에 세 번째 칸 국제광고제를 보게 되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은 채, 그저 이제는 익숙한 습관처럼 찾게 되었는데 꽤나 재밌게 보았다.

 

그리고, 오늘. 네 번째 칸 라이언즈 크리에이티비 페스티벌.(구 칸 국제광고제). 솔직히 이제 신선함은 많이 떨어진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광고도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약간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 광고 컨셉도 그렇고, 공공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렇고. 처음에 봤을 때는 엄청 놀랍고 재미있었는데, 여전히 의미는 있지만 더 이상 새롭지는 않다.  그게 참 안타까웠다. 뭐 공항에서 사람들이 노래 부르는 거 같은 경우, 좋기는 너무 좋았지만. 예전에서 기차역에서 사람들이 군무를 추던 광고가 오버랩 되었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노래를 주문을 했나? 받았나? 했던 광고도 생각나고,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노래를 불러주던 광고도 생각나고, 자동차인가 타이어 광고에서 악기를 쓰지 않고 합창단이 그 소리를 다 내던 것도 떠오르고. (근데 뭐 하나 명확하게 기억하는 게 없다. 이놈의 기억력. 이놈의 집중력)

 

가장 좋았던 것은 일본 이동통신회사인 도코모의 광고. 숲 속에 실로폰(?) 같은 목판 건반을 만들어 도미노처럼 아주 길고 길게 설치한다. 그 위를 굴러가는 나무공이 한 음, 한 음을 만들어내며 자연의 소리와 함께 아주 아름다운 연주를 탄생시킨다. 일본의 광고는 그런 실험정신(?)이 있는 것 같다. 첫 칸 국제광고제 때도 굉장히 인상 깊었던 일본 광고 중에 하나가 어떤 동아리에서 건전지로만 가는 비행기(건전지 광고였을 것이다. 아마도)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그려냈던 것이다. 그 과정은 제품을 팔기 위한 광고를 만들기 위한다는 것만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감성을 움직이는 그 노력이 보이는, 게다가 그 아름답기까지 한 광고였다.

 

그리고 수치를 활용해서 의미 없는 것과 따뜻한 것들을 비교한 광고. 예를 들면, 무기 한 대를 만드는 것이면 몇 천 개의 봉제인형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는 코카콜라의 광고였는데, 수치를 통해서 약간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면서도 그걸 자신들의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는 게 좋았다. 하지만 이 광고가 좋게 느껴진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아이들이 부르는 합창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적절한 따뜻함. 정말 짧은 시간에 승부를 봐야 하는 광고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정말 음악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 머리 속에 넣고 있다 또 점점 사라지고 잊혀지게 될까 인상 깊었던 것을 적어보자면 공익 광고 중, 유니세프에서 TV를 끄라는 광고. 꺼진 TV화면에 비친 가족의 단란하고 화목한 모습. 단순했지만 굉장히 의미 있었다.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뭐, 그런 마음이랄까. 그리고 부패 경찰, 거짓말쟁이 애인 등을 컨셉으로 안전함을 강조한 자동차 광고. 나 지금 무슨 대사할 거라면서 익숙한 클리셰들을 모두 모아 놓은 영상을 보여주고는 언제까지 똑 같은 걸 보고 있겠냐는 HBO 광고 등등.

 

요즘 머리가 나빠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관심과 주의력이 없어서 그런지. 보고 돌아서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방금 보고 나와 글을 적고 있으면서도 또 뭐가 있었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한숨이 나지만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생각이 나는 한 장면이 있다면 그걸로 괜찮은 거 아닐까, 라는 위로의 말을 내게 던지며 내년 이때를 기약해야겠다.


20110930 / KU시네마테크



 

뭐랄까. 그냥 예고편이 너무 신나 보였다. 음악 테러리스트. 고상하고 우아한 음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던지는 펑크 사운드! 무조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전날 기대했던 영화에 살짝 실망을 한 터라 약간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일단 한번 나의 감각을 믿어보자 했다) 내 앞쪽으로는 관객이 2명 밖에 없었는데영화가 끝나고 나갈 때까지도 나는 그 영화관에 나를 포함해 3명 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근데, 3명이서 얼마나 웃으면서 봤는지. (그렇다고 미칠 듯한 개폭소는 아니었지만) , 나중에 나갈 때 보니까 우리 뒤에서 3명 이상의 사람이 있긴 있었다. 하하하.

 

영화는 한 남자의 자전적인 자기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음악가 집안에서 유일한 음치로 태어나 형사를 하고 있는 한 남자. 동료가 크게 틀어버린 음악을 꺼버릴 정도로 그는 음악이 싫다. 그리고 한 여자가 있다. 운전대에 옆에 메트로놈을 놓고, 신나게 운전을 하는. 그녀가 몰고 있는 차의 짐칸에서는 드러머가 미칠듯이 연주를 하고 있다. 여자가 운전을 하는 소리와 드럼 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하나의 음악이 된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녀가 버린 차에 시한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신고가 들어가고, 남자는 그 현장으로 간다. 그리고 남자는 그 소리가 폭탄이 아닌 메트로놈(박자기)이라는 것을 단박에 파악한다.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소리니까.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는 여자와 드라머. 두 사람은 말한다. 클래식만이 가득한 도시에서 진짜 음악을 보여주자고. 진짜 테러는 이제부터 시작이고.

 

그들은 계획한다. 여섯 명의 드러머가 도시 전체를 연주하는 것을. 네 장소에서 네 번의 연주를 펼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리만 골라서. 혁신적으로. 그리고 그 테러를 감지한 남자는 그들을 행적을 쫓는다. 간간히 그녀와의 러브스토리도 살짝 살짝 보태가면서.

 

우선, 그 발상이 정말 기발하다. 그들의 첫 번째 연주는 병원에서 이뤄진다. 치질 환자를 악기 삼아 병원에서 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소리들을 모아 연주 하는 그들의 모습. 정말 이건 보지 않으면, 아니 듣지 않으면 절대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머니, 허니인가에서은행에서 분쇄기, 도장, 돈 세는 기계, 계산기, 키보드 등을 통해 연주를 하는 것도 최고. 정말. 멋있었다. 흥겨웠고. 그리고 연주회장 앞에서 크레인 등으로 연주를 하는 것은 좀 과격하긴 했으나 것두 좋았고.

 

하지만 역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음악을 위해서 불법을 감수하는 건 통쾌하다 쳐도, 사람이 죽을 뻔 했는데도 개의치 않고 연주를 완성하는 그들을 보면서 조금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술이라는 게, 창작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정말 위대하지만 그만큼의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

 

영화는 꽤나 판타지적이다. 음악을 싫어한 그 경찰 아저씨는 그들이 연주한 것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그들이 연주했던 물건이나 사람들에게서 나는 그 어떠한 소리도 남자에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고음이 날 때면 귀에서 피까지 나고. 하지만 훗날 도시 전체를 그들을 연주하고 난 후에, 그제서야 그는 들리지 않는 음악으로 인해 편안하게 세상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건 아마도 판타지일 것이다. 그가 실제로 음악을 듣지 못하게 된다기 보다 그를 억압하고 있던 음악에 대한 강박관념이 풀리는 과정이지 않을까. 음악을 잘해야만 하는 집안에서 받아왔을 음악에 대한 스트레스. 하지만 표현할 수 없음. 여자 일당을 잡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음악가들이 경찰서에 잡혀왔을 때 그는 그들의 악기를 집어 던지며 폭발한다. 그런데 그 악기를 부수는 소리마저도 음악으로 표출이 되었으니까. 음악은 그렇게 정형화된 것이 아니며,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잘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그래서 어려워할 필요도, 힘들어할 필요도 없다는 걸 남자는 알게 된 것이다.

 

아마도 마지막 남자가 작곡한 그 음악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 성장과 극복의 결과물이지 않았을까. 음악을 들을 때마다 숨이 멎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불안한 듯 입 주위를 쌜룩 거리던 남자의 얼굴이 연주회장에서도 평안한 표정을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4번의 음악 테러 이후 먹고 살기 위해 클럽 같은 곳에서 편안한 노래를 부르던 여자의 모습도. 다른 곳에 있지만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너무 재치 있고 기발한 영화였다. 보는 내내 발을 들썩였다. 몸을 좌우로 흔들 흔들. 그리고 이 영화는 크레딧 화면이 끝날 때까지 봐야하는데…. “이 영화는 연출된 것이니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감전은 치명적입니다’”라는 멘트에 얼마나 빵 터졌는지. 중간에 그 악보가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된 부분도 좋고.

 

사실 음악에 경중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이 영화에서는 클래식이 너무 정형화되고 정확성만 중시하는 권위적인 음악으로 표현되었으나, 한 음악 장르에 대한 비판보다는 새로운 음악과 자유로운 음악에 대한 추구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정말 느끼는 건데, 나는 FunkRock&Roll이 좋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