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16 / 이해랑예술극장



강신일 아저씨의 이름 석자로 선택한 이름이었다.
물론 '2010 제64회 토니상 최다 수상 연극'이라는 홍보 문구도 조금은 내 마음을 흔들긴 했지만.
정말 어떠한 내용도 알지 못하고, 그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레드>는 보고 싶은 연극이었다.
하지만 44,000원.
뮤지컬에 비하면 비싼 금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25,000원이 넘어가면 멈칫하게 된다.
이 빌어먹을 가난함.
아니다. 밥 먹는 거, 술 먹는 거 조금만 줄이면 충분히 보고도 남을 돈인데.
뭐, 이런 헛소리는 각설하고.
보고는 싶었으나 가격때문에 조금 고민하던 중,
전석 30,000원의 이벤트를 하고 이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이 공연보다는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은 국립극장에서 하는 <상상병 환자>를 볼까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역시나 나는 나에게 추천을 받아야지만 마음이 동요한다.
아무리 추천 받았다고 해도, <레드>가 나는 조금 더 보고 싶은 걸.

하지만 역시나 나기가 귀찮은 일요일 오전.
어떻게해도 몸을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어젯밤 폭식으로 인한 내장기관의 거부반응까지.
미루고 미루다, 이 공연만큼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 돈도 좀 아깝고, 이 공연은 오픈런은 아니니까.)
몸을 일으켰다.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을 듯 싶어, 중간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근처에서 택시를 타고 공연장으로 갔다.

동국대 안에 있는 이해랑예술극장.
국립극장을 가느냐 가끔 지나치기는 했지만 이해랑예술극장은 처음 가봤다.
동국대 내에 극장이 있는지도 몰랐다.
공연 10분 전, 서둘러 극장을 향해 뛰었다.
극장 앞에는, 많은 연기실기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아마도 입시 실기 시험이 있는 날이었나보다.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들어간 이해랑예술극장은 꽤나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맛이 있는 극장이었다.
로비에서는 알고 보면 더 좋을 이야기이라고 해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사실 저번에 <예술하는 습관>을 보면서,
사전 정보가 좀 있었더라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을 들었었기 때문에
멈칫 했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뭐, 어차피 백지상태로 보기로 마음 먹었던 거!
그냥 무지하게 들어가자.
모르면 모르는 대로, 보고 느끼면 되는 거지, 생각하며 현수막에서 시선을 거두고,
공연장 안으로 발을 옮겼다.

무대는 화가의 작업실을 그대로 재연해놓았다.
내용을 전혀 모르는 나도, 아! 여기는 화실이구나, 라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챌 정도로.
사실적으로 꾸며져 있는 무대에 대한 호감이 생겼다.
그리고 암전 후 모습을 드러낸 강신일 아저씨.
아, 강신일 아저씨.(아저씨에 대한 짧은, 혹은 아주 기나긴 단상은 이후에 다시 말하기로 하자)
강신일 아저씨가 맡으신 화가, 마크 로스코가 뭔가를(객석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조수가 될 캔이다.
마크 로스코는 그에게 자기는 그의 무엇도 되어줄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은 그의 고용주이니,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이 계속될수록, 그들의 대화에는 예술에 대한 지식이 총 동원된다.
다행히 관심을 갖고 있던 미술사에 대한 부분이 많았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렇다.
나는 이 연극이 참 재미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그 모든 대화들이.
예술에 대한 대화들. 지나간 화가들에 대한 대화들. 새롭게 두각을 나타나게 된 화가들에 대한 대화들.
그리고, 위대한 화가들에 예술에 맞서, 새로운 화가가 되었지만 시간에 흐름에 따라 또 고루한 화가가 되어버린 늙은 화가.
예술을 바라보는 상업적인 시선들.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어렵지만 재밌었다.
뭔가 미술사에 대한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도 들었고, 철학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 같기도 했고.
처음에는 그래서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는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너무나 흥미진진했지만)
하지만 이 연극은 그냥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2인극이 참 매력적인 게,
두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 관계 속에서 무수히 많은 감정의 변화들을 볼 수가 있다.
처음,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한 식으로 흐를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조수에게 자신은 고용주일 뿐, 스승도 될 수 없으며, 정신 상담가도 될수 없다고 공언을 했던 마크 로스코는,
캔의 가장 아팠던 이야기를 들어준다.
아무렇지 않게.
아,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나겠구나.
기대를 했는데,
2년이 지나고 두 사람의 갈등은 폭발해버린다.
캔이 마크 로스코에게 자신의 주소나 알고 있냐며, 자신의 작품을 궁금해 해본 적이나 있냐며,
마크 로스코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다고 비난을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마크 로스코가 상업화된 예술을 비난하면서 고급 레스토랑인 벽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

그렇게 캔이 폭발하고 난 후,
마크 로스코는 그를 인정한다.
그제야 캔이 존재하게 되었다면서.

사람과 사람간의 이야기.
누군가가 멘토가 되는 이야기.
멘티가 되는 이야기.
요란스럽게 관계 맺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이야기.

잭슨폴락이나 고흐, 마티스에 관한 이야기들도 흥미롭지만
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아.름.다.웠.던. 그런 연극이었다.
(아름다웠더라는 표현을 마크 로스코가 들으면 엄청 싫어했을 듯 싶다. ^^;;
이 연극에서 또 좋았던 게 '비극'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냥 무조건 '좋다'라는 희극의 삶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비난하는.
조금은 삶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비극을 강조하면서도, 절대 어두워지지 않았던 연극.
나는 이 마크 로스코가 실존 인물인지 몰랐는데,
연극을 다 보고 난 후,
또 그가 궁금해졌다.

마지막, 이 연극의 히어로.
강신일 아저씨.
진짜 이 분에게 또 반해버리고 말았다.
처음로 이 분을 '인지'하게 된 것은 2004년 연극열전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랐던 <한씨연대기>에서 였다.
김대연 아저씨와 함께 기억이 되는데, 그 목소리하며, 연기하며.
너무 인상 깊었고, 이후에는 드라마 <부활>, 영화 <강철중> 등등에서
확실하게 각인이 되었다.
연극 <나는 너다>에서도 잠깐 영상으로 우정출연해주셨는데, 역시 미친 존재감.

좋은 연극을 봐서 기분이 좋았다.
예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어줘서 좋았다.
하지만,
나는 점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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