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요즘 꽃혀있는 작가라면서 김연수의 책 한 권을 빌려줬다.
<청춘의 문장들>!
일주일, 힘들면 이주일에라도 책 한권씩을 꼭 읽겠노라 다짐했지만,
친구에게 빌린 그 책은 일주일이 다 되도록 채 100페이지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 책의 저자 소개에
작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나왔는데,

작가 김연수가 좋아하는 것.
낯선 지방의 음식.
그리시인 조르바.
나이가 많은 나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자리.
중국어로 읽는 당나라 시.
겨울 서귀포와 봄의 통영과 여름의 경주.
달리기.

작가 김연수가 싫어하는 것.
소문을 알리는 전화.
죽고 싶다는 말.
누군가 울고 있는 술자리.
오래 고민하는 일.

그 하나 하나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꽤나 인상깊게 다가왔다.
언젠가 나도 일기장의 맨 앞장에,
저러한 글을 써본적이 있으니까.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그런데 이제는 그곳에 썼던 글들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그 일들이 좋지 않기 때문일까.
그것은 더 이상 그 일들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작가처럼.
내 청춘의 한 시절처럼.
나도 그렇게 다시 적어보고 싶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

근데, 예전처럼 떠오르지가 않는다.
추상적인 단어들만 머리에서 뱅뱅거릴 뿐.

적어나갈 것이다.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
진정 내가 싫어하는 것.
진정 내가 하고 싶은 것.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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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또 그렇게 다녀간 블로거를 삭제하고 말았다.
그냥 걷다보니 그 아이의 블로그에 다달았다.
항상 그랬다.
그 아이의 블로그에 다달을 때는 일종의 두려움이 생긴다.
누군가의 일상이 또 다른 이에게는 그러한 상처가 되곤 한다.
상대는 그저 살아갔을 뿐인데.
충수 속에 고이 고이 숨겨뒀던 열등감이 고개를 처드는 것은 손 써볼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숨어서 보고 싶진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하고 의미 없는 안부따위도 묻고 싶진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슬프다고.
널 보면 나는 내가 한 없이 작아 슬프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저 나 역시 살아갈 뿐.
살아가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간 내 충수 속 열등감도 그 아이를 보고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는 날이 있을 꺼야.
그러니까. 그저 살아나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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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일자 : 2009년 6월 11일 목요일
장소: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

연극 <다락방>(사카테 요지 연출,작)에 관심이 생긴 건 한 통의 문자 때문이었다. “일본 최고의 화제작!! [다락방] 6.8~6.28/아르코예술극장소극장 6월 11일까지 프리뷰 40%”라는 광고 문자에서 40%이라는 단어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또한 일본 최고의 화제작이란 글귀 역시 임팩트 있게 다가왔다.

알게 모르게 일본 희곡을 종종 접하게 되었다. 아마추어 공연으로 밖에는 본 적 없어 꼭 프로들의 공연으로 보고 싶은, 좀더 솔직해지자면 한 번쯤 연기해보고 싶은 <분장실>(시미즈 쿠니오 작)도 일본 작가의 작품이었다. 또한 미도리의 울부짖음으로 내 가슴을 후려치고, 일본 여성 연출가의 모습으로 내 심장을 찢어놓은 <20세기 소년 소녀 창가집>(정의신 작, 마쓰모토 유토 연출) 역시 일본 작품이었다. 또한 미타니 코키라는 일본 작가를 알게 되면서 <웃음의 대학> 등 일본 희곡에 관심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다음 주에도 공연을 볼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돈 한 푼 못 버는 상황에서 연극을 지른다는 게 좀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기 때문에 과감하게 예매해 버렸다. 40% 할인이 적용되는 11일로! 작품은 대략 히키코모리를 소재로 한 이야기라고 알고 있었다. 최근 한 3개월 가량. 문득 문득 내가 히키코모리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직 완전한 히키코모리는 아니지만 충분한 가능성이 있겠다고. <다락방>의 대사 중 일부를 따르자면 쁘띠 히키코모리 정도? 사람과의 교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 번 밖에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방, 그 중에서도 내 이불 위에서만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다락방>이란 이 연극이 눈에 밟혔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락방>은 히키코모리들이 스스로 갇혀 살 수 있도록 고안된 한 평 남짓의 ‘다락방’이 온라인으로 불티나게 팔려가며 유행이 되던 일본을 무대로 하고 있다. 남동생이 그 다락방 안에서 다섯 달이 넘도록 틀어박혀 있다가 자살해버리자 형이 오리지널 다락방 제조자를 찾아다니는 것이 일단 주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학교에 가지 않고 인터넷으로만 소통하는 소녀, 영화 <완전한 사육>처럼 한 여성을 10년간 사육해온 남성의 이야기 등등 다양한 에피소드를 갖는다. 연극은 시공간을 계속 바꿔가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때문에, 하나의 서사를 기대하며 연극을 따라가기는 매우 힘들다.

어떻게 보면 중구난방 제멋대로 관객을 배려하지 않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조합들이 마음에 들었다.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연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도 좋은(버릴 것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자신이 마음에 드는, 혹은 지금 자신의 상황과 맞아 떨어지는, 혹은 자신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만 취하면 된다는 것이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머리가 좋은 관객은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이야기들이 하나로 관통하는 지점을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에는 불행하게도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모두 공통적으로 사회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흐름 전부와 중간 중간 나오는 몇몇 장면들의 의미까지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 연극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100% 이해를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이 좋았던 이유는 캐릭터에게 느끼는 동질감과 연극에서 보여주는 사회적인 불안감, 그리고 무대 활용이 돋보이는 연출과 몇몇 배우들의 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심각할 수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무겁고 어둡지만 않고 밝고 유쾌하고 유머가 있게 그려냈다는 점이 좋았다.



많은 등장인물, 그 속에 조금씩 내가 들어 있었다. 쁘띠 히키코모리라고 불리는 소녀. 소녀는 학교에 가지 않고 ‘다락방’ 속에서 인터넷만으로 소통을 한다. 그녀를 찾아온 소년은 그녀에게 <안네의 일기>를 선물한다.(이 에피소드 중에서는 소년이 소녀의 앞에서 자위를 하는데, 민망할 수 있는 장면을 연기와 연출로 웃음이 나게끔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후에 그 소녀가 <안네의 일기>를 가지고 독백을 하는데, 그게 참 내 마음과 같아서 가슴을 후벼팠다.(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기억력을 저주한다. 극본이 너무 보고 싶다)

나는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배낭에 내 물건을 준비해두기로 했다. 언제나 소풍 하루 전날 같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 안네의 일기 중, 소녀-

웃음 포인트가 많았던 것도 이 연극의 매력이었는데, 일단 ‘다락방’에서 잠복근무를 하는 형사 커플이 너무 웃기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환생, 전생처럼 다른 형태의 ‘다락방’을 보여준다. 연기와 내용은 웃기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나 상황 속에서는 ‘다락방’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사람을 타인과 고립되게 만들고, 혹은 관음증 환자처럼 만드는 ‘다락방’이라는 곳이 다른 형태로 과거에도 존재하고 있었고 혹은 앞으로도 또 다른 형태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말이다.

특히나 미래의 상황인 듯 보이는 전쟁 장면에서 다락방은 벙커로 사용되는데 거기서 아소 총리에 대한 내용이 나오며 ‘일본은 히키코모리가 됐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는 세계화라고 하지만 오히려 국가적으로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 고립되어 가고 있는 일본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 대한 뼈 담긴 한 마디가 아닌가 싶다.

또한 ‘다락방’에서 죽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도 인상 깊다. 그를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카페 동호회 멤버들 이었다. 그 남자의 아버지와 동호회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가지고 왜곡된 판단을 내린다. 아버지와도 소통이 없었으며, 동호회 친구들은 인터넷이라는 세상 속에서만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체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의 시체 처리 방식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남자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채 꿈을 꾸고 있는 것인데.

재미있었던 것 중 하나가 시체의 아버지는 여성배우가 그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시체의 살아생전의 모습일지 아닐지 모르는 남자가 하나 나오는데(시체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기 때문에 단정 지어서 남자를 시체의 과거라고 말하기가 그렇다. 보는 순간에는 당연히 시체의 과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때 그 남자의 엄마로는 남자배우가 그 역할을 맡았다.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연결고리였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자살한 동생으로 인해 ‘다락방’의 제조자를 찾아가는 형의 이야기인데 생각할 부분이 많았고, 형의 대사 중 많은 공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은 어렵기도 했고,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기도 했다. 그래서 아쉬움이 남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극의 잘못이 아닌 나의 잘못인 것 같다.

수많은 에피소드 중 산에서 조난당해 산장 ‘다락방’에 도착한 남자의 이야기 경우 갑자기 공포물이 되어서 정말 오싹했는데, 관객으로서 즐거웠다. 한 연극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굳이 필요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색다른 즐거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다락방’의 다른 형태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형이 동생과 산에서 조난 당했었던 것과 관련이 되는 건지 그 접점을 잘 캐치해내지 못하겠다.

연극 <다락방>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연극 공간이란 홍보 카피를 내 걸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연극의 많은 부분들이 그 다락방 안에서만 이뤄진다. 물론 그 외의 곳에서도 배우들이 연기를 하긴 하지만, 주가 되는 무대는 역시 다락방이다. 그 좁은 장소를 무한하게 변형시키고, 그 좁은 장소에서 그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 작가의 역량이 대단해보였다. 또한 마지막에 그 좁은 장소가 딱 한 번 확장되는데, 깜짝 놀랐다. 이건 소극장 연극이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만큼은 대극장처럼 느껴졌다.

또한 일본 연극의 특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실연할 수 있는 부분들은 실연하는 게 좋다. 다락방의 문 밖으로 비가 내리는 것. 진짜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용접(?)하는 기계도 인상 깊었다. 무대 활용 능력에 큰 박수를 보내면서, 간만에 생각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웃음이 끊이질 않는 연극을 봐서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개인적으로 감성을 자극하는 연극은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이성을 자극하는 연극이었다.




이치하라 하야토 때문에 보게 된 <루키즈>. 하지만 하야토에게로 향하는 눈길을 돌리게 만드는 배우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하야 코이데 케이스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잘 생긴 듯 보였고, 어떻게 보면 그 잘생김이 매우 평범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같은 잘 생긴 느낌. 하지만 도저히 내가 저 배우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 <루키즈> 11편을 다 보고 나서, 그의 우는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검색창에서 그의 이름을 쳐보니 <노다메 칸타빌레>가 나오는 것이 아니가? 그러자 머릿 속을 스치고 가는 인물 하나가 있었다. 설마? 정말? 진짜? 설마 정말  진짜 그는 마스미짱이었다. 치아키 선배를 좋아하는 아프로 머리의 간신 수염을 한 남자.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눈물 많고 연약해보이지만 누구보다 의지가 강했던 모범생 타입의 <루키즈> 미코시바와 수다스럽고 변태(?)같은 <노다메 칸타빌레>의 마스미 짱을. 그러자 언젠가 잡지에서 봤던 그의 기사가 떠올랐다. 그 당시에도 잡지를 보며, 잘 생겼구나, 마스미짱이라니 인정할 수 없어라고 울부짖었던 내가 있었는데.

이 외에도 <고쿠센 2> <연공>에서도 나왔었다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솔직히 <고쿠센 2> 자체를 1편에 비해 관심있게 보지 않아서, 케이스케 외에도 기억에 남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누군가에 인상에 깊게 남는 외모와 연기가 아니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놀란 것이 때론 주역으로서도 전혀 손색 없는 그가, 또 때로는 존재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평범함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 참을 수 없는 갭이 너무 좋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조금만 각도를 돌려서 바라보면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이 보이는 것만 같아서 반해버릴 것 같다. 영화 <사이보그 그녀>에서의 순수남도 <키사라기>에서의 이중적인 모습도 너무 좋았다.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그에게 관심을.




내가 드라마를 선택할 때 가장 많이 고려하는 것이
배우와 작가이다.
그렇다면 <타이거&드래곤>은 누구 때문에 선택한 것일까?
나가세 토모야? 아니면 오카다 준이치?
No, No, No!

바로,


요 아저씨 때문이다.
니시다 토시유키 아저씨.
<매직아워> 이후 보게된 미타니 코키 작품이 많이 등장하셔서
내 눈길을 사로 잡은 후,
<하얀 거탑> <겟업> 등에서의 모습으로
인상을 확 남겨 버리셨다.

이곳에서도 역시 밀리지 않는다.
나가세 토모야나 오카다 준이치에게!
오카다 준이치의 아버지 역이자,
일본의 전통문화(?)인 로쿠코의 대가로
제자 나가세 토모야의 스승이자,
야쿠자 나가세 토모야의 체납자로,
연기를 선보인다.
그 분의 코믹 연기에는 뭔가 뭉클한 것이 있어서 좋다.

<타이거&드래곤>은 밤에는 야쿠자로
낮에는 로쿠코가로 생활하는 토라지(나가세 토모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야쿠자 토라지는 돈베이(니시다 토시유키)가 빌린 돈을 받기 위해,
그에게 수업료를 내고 로쿠코를 전부 받고, 다시 그 수업료를 돌려 받는다.
그의 이중 생활에서
드라마의 재미와 갈등이 모두 압축되고 있다.

매회 한 편의 로쿠고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를
토라지가 실제 일어난 사건들과 연관시켜 각색해 다시 들려준다.
액자식 구성으로 펼쳐진 이야기 속의 이야기.
연출의 힘이자 이 드라마가 특별해질 수 있는 비결이다.

첫회를 봤을 때는 익숙하지 않은 로쿠고에,
어디서 웃어야 할지를 몰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편히 먹고 바라본다면,
새로운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진다.

계속 너무나 따뜻한 온도로 
사람을 자극한다.
그 따뜻함에,
너무나 행복한 기분이 느껴지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나가세 토모야와 오카다 준이치의 연기를 처음으로 봤는데
(준이치는 본 것 같기도 하지만;;;;)
웅후후. 일단 얼굴이 좋으니까.
나가세 토모야의 혓바닥을 내돌리는 모습에,
아주...죽는 죽는 줄 알았다.
왜이렇게 마니악한 부분에 빠져드는 건지.
그리고 오카다 준이치는 약간 무게감있게 봤는데,
코믹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니.

이 세 명의 배우 외에도,
모든 조연들의 어울림이 있는,
배우, 캐릭터, 이야기, 연출.
모두 좋았던 드라마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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