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스페셜 <김명민은 거기에 없었다>가 이상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뒤늦게 <하얀 거탑>에 빠져버린 것! 물론 <하얀 거탑>이 방영되던 시점에도 김명민과 이선균의 조합과 일본판의 유명세 때문에 약간의 관심이 가기는 했었다. 몇 장면을 보고 난 후 잘 만든 드라마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너무 무거워 보여서 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묵직한 느낌의 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권력 싸움 등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드라마를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신드롬에도 불구하고 눈을 돌리지 않았는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이렇게 빠져버리게 되어버렸다.

물론 이 드라마에 대한 흥미는 이전부터 있었다. 일본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에서 카라사키 토시아키를 보고 반한 후, 그 사람이 <하얀 거탑>의 장준혁 역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나왔다는 이유로 영화 <20세기 소년>까지 봤기 때문에 <하얀 거탑> 역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손을 대기가 힘들었다. 손을 대면 멈출 줄 모를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얼마전 일본판 <하얀 거탑>의 마지막 회 일부를 보고 더욱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K양과 나눈 김명민 이야기에 <김명민은 거기에 없었다>를 보고 폭발하게 된 것이다. 한국판을 볼까 일본판을 볼까 고민했는데 난 역시 배우의 힘이 강하게 작용을 하는지라 일단은 일본판을 꺼내들게 되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일본어를 모르는 내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물론 행동이나 표정 등을 볼 순 있지만, 이도 드라마의 특성이라든지 문화적인 차이로 상대성을 지니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일단 좋았던 것은 캐릭터다. 중심 인물뿐 아니라 주변 인물까지 캐릭터가 살아있다. 자이젠 고로(장준혁)는 말할 것도 없지만, 무엇보다 사토미 슈지(최도영)의 캐릭터가 좋았다. 물론 그를 융통성 없는 이상주의자라고,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세상에 한 명쯤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외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나는 사토미가 좋다. 그는 존재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잊어서는 안 되는 ‘희망’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에 자신만만했던 고로도 유일하게 그의 앞에서만 무릎을 꿇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절대 할 수 없는 단 한가지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사토미이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토미를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좋아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사토미가 세상에 존재하길 바라는 세상 밖 인물이라면 자이젠 고로의 스승인 아즈마 교수는 철저하게 세상 속 인물이다. 의사 가문의 일원으로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 지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주목받는 자이젠 고로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혀 그와 대적을 하게 된다. 그가 나는 가엽고 또 가여웠다. 그가 옷에 걸린 나뭇가지에 화를 내던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자이젠 고로처럼 확실하게 강하지도 못했던 그의 인간적 약점이 서글프고 또 서글펐다.

<하얀 거탑>을 보면서 좋았던 점 중 하나가 관계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힘이다. <하얀 거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자이젠 고로가 조교수에서 교수 임용이 되기까지의, 그리고 나머지는 환자와의 의료 재판!

자이젠 고로와 사토미가 함께 있는 모든 장면이 좋았다. 둘은 대학교 시절부터 함께 했던 친구. 하지만 둘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자이젠 고로가 야망을 품고 권력을 추구하는 천재 의사라면 사토미는 그저 의사로서 존재하기만을 원한다. 그렇게 서로 대립의 각을 세우면서도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라니.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환자를 살리고 싶다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흥미롭다.

또한 고로와 장인의 관계도 흥미롭다. 고로의 그 긴 여정이 시작되는 것은 장인의 지퍼 라이터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300원짜리 싸구려 라이터를 쓰던 그에게 자신의 지퍼 라이터를 건네던 장인. 개인 산부인과를 하는 장인은 데릴사위인 고로를 통해 자신의 꿈을 대리만족하려고 한다. 온갖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장인. 하지만 고로의 죽음에 있어 그가 자신의 대리품으로 고로를 앞세웠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했다는 게 느껴졌다.

자이젠 고로와 그의 애인 케이코도 주목할 만하다. 의대를 중퇴하고 고급 술집을 운영하게 된 케이코. 자이젠 고로의 정부인 그녀는 유일하게 고로가 마음을 여는 사이다. 병원 사람들이 운영하는 술집이기에 가끔씩 고로에게 정보를 전달해주기도 한다. 둘은 관계는 단순히 불륜으로 바라볼 수 없다. 철저히 관찰자적인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케이코가 고로에게 날리는 직언들은 사토미 못지 않은 파급효과를 준다. 더욱 재밌었던 부분은 고로의 부인이 애인 케이코의 존재를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는 부분.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고로와 케이코의 사랑도 마음에 들었지만 특히 사토미와 세이코의 관계도 좋았다. 물론 이들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미묘한 설렘이 느껴졌다. 엄한 의사 집안에서 온실 속 화초로 자라온 사에코는 그 숨 막히는 공간이 버겁기만 하다. 처음에는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였으나, 점점 권위에 집착하는 의사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바라보며 의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걸 깨준 사람이 사토미. 사토미를 보면서 아직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점점 강해져간다. 사토미의 아내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사토미로 향하는 사랑의 마음을 어찌하지 못한다. 불도저 같이 밀어붙이지도 못하면서, 멈추지도 못하는 그녀의 사랑이 좋았다. 그녀의 마음을 느끼지만, ‘당신은 내 아내의 친구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정리해버린 사토미. 21회 중 단 몇 번의 장면일 뿐이지만 그 순간 순간이 나 역시 설렜다. 미세한 파동이 나의 감정을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연출이다. 심각하고 무거울 것으로 생각되었던 드라마였지만 일본판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다루고 있는 것들은 무겁고 어려운 주제였으나 그 외적인 부분에서는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드라마였다. 특히 장인 역을 맡은 니시타 토시유키의 코믹 연기는 압권이었다. 시종일관 가발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이라던지... 이 분 <매직아워>에서도 큰 웃음을 선사하시더니, 역시라는 말이 나오게 해주었다. 교수 부인회 역시 재미있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내조의 여왕>의 축소판이 <하얀 거탑> 속에서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드라마의 음악도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마지막에 흐르는 엔딩공 <Amazing grace>. 자이젠 고로와는 다른 도 그렇지만, 자이젠 고로가 흥얼거리는 노래와 그의 수술하는 손놀림은 마치 하나의 춤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 중 하나는 아우비슈츠 수용소를 다녀오는 자이젠 고로의 모습이다. 이걸 한국판에서도 했을지 매우 궁금했다.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다 보고 나니, 한국판 <하얀 거탑>이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또 시작을 하고 말았다. 이미 일본판을 본 상태에서 어느정도의 치중된 감상이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앞섰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몇 회가 지나기 시작하자, 이것은 일본판과는 전혀 다른 한국판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큰 줄거리는 같지만 일본판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여실히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준혁과 최도영의 관계만해도 그렇다. 방영 당시 최도영의 캐릭터에 대해 크나큰 비판이 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 일본판을 본 사람이라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 생각에도 일본판에서의 최도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본판이 자이젠 고로와 사토미가 중심 인물이었지만, 한국판에서는 그저 장준혁이 중심 인물이다. 그를 둘러싸고 나머지 것들은 그의 인생을 보여주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했다. 일본판에서 중요시 되었던 진지한 성찰 대신 한 인물의 인생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사가 더 중요해 보였다.

아직 한국판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원작이 미칠 듯이 궁금하다. 소설을 영상화 할때는 당연히 연출자와 작가에 의해 선택되는 부분들이 있다. 원작을 그대로 가지고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지금 당장 어떠한 드라마가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일본판이 훨씬 더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작을 읽고 나면 조금은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꼭 드라마 하나를 보는데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겠나 싶지만 그러고 싶다.




<결혼 못하는 남자> 제목에서 왠지 찌질한 느낌이 폴폴 풍기지 않는가?
몇 번이고 스쳐지나갔던 제목이지만,
왠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얼마전 <러브 셔플>을 본 후,
뭔가 공동체적인 느낌이 좋다는 내게 친구가 이 드라마를 추천해줬다.
우리 나라에서 리메이크해 6월에 선보인다고도 하고,
큰 맘(?)을 먹고 이 드라마를 선택했다.

결과는 한 마디로 최고였다.
연애를 원치도 않을 뿐더러 서툴다는 점은 얼마전 봤던 <호타루의 빛>과도 조금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내 나이 2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40살의 이 남녀의 사랑에 더 끌리는 것을 어찌하란 말이냐!

아베 히로시.
<드래곤 사쿠라>에서 본 적은 있지만, 별 흥미가 없었다.
근데,
저 남자가 좋아서 죽는 줄 알았다.
 
표정 하나 하나, 웃을 듯 말듯,
정말 의미를 모르겠는 표정,
그 걸음 걸이,
후질근한 옷차림.
정말 디테일이 살아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주인공인 노처녀 의사 역을 맡은 나츠카와 유이의 느낌도 너무나 좋았다.
튀지 않으면서도 맑고 깨끗한 느낌.
여 배우로서는 평범해 보였지만,
배역에 동화되어 보여주는 표정은.
정말 좋았다.
웃을 듯 말듯.
은근 시크한 표정.

나는 이 두 남녀의 표정과,
더불어, 캔짱의 표정에 반해 버려나보다.
캔짱은 요 밑에 있는 개의 이름이다.



사랑 이야기를 다루지만,
사랑 이야기에만 초점을 둔 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 서툴기만 했던
한 남자의 변화기가
나에게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다가왔다.

그리고 40살이 되었지만,
결혼이 아닌 연애가 하고 싶은 여주인공.
그리고 서서히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사랑.
설레였다.
손 한 번 잡지 않았지만,
그들이 진찰식에서 나누었던 그 모든 피튀기는(?) 대화들이
사랑의 밀어처럼 느껴져서,
간만에 마음이 설레였다.



자신의 안에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이 있다.
그것을 발견해 내는 즐거움.
아마 80 평생을 산다면,
난 죽는 그 순간에도 또 다른 나의 모습에 즐거워하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글이라는 것이 그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자신이라는 사람이,
이 공간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포장된 그럴듯한 말들.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

즐거움은  개뿔.
개나 줘버릴 즐거움.
무서움. 두려움. 공포.

3개월을 훌쩍 넘긴 백수 생활.
항상 바쁘게 열정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해왔던 나.
그리고 그런 모습이 나라고,
여겨 왔던 나.

그런 나는 어디로 갔을까.
너무나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
아무것도 하지 않음.

최소한의 움직임.
최소한의 언어.
최소한의 시선.

아침 8시에 일어나 그 다음날 아침 8시까지,
드라마 세 작품을 모두 섭렵해 버린 날.
드라마는 재밌고도 재밌건만,
나는 내가 미친 것만 같아서 두려워진다.

그렇게 막나가는 하루를 보내고,
끼니를 구하러 나간 외출길.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며,
인생에 대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
내가 어이없고 또 어이없어,
나는 내가 우습고 또 우스워진다.

이젠,
더 이상은 안 돼겠어.
이제 더 이상은.

이제는,
이제는 좀.
움직이고 싶다.

움직여야 한다.
움직일 것이다.


제목: 골든 슬럼버
저자: 이사카 코타로



이.사.카.코.타.로.
이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교보문고에서였다.

최근 일본영화에 좀 빠져있었다.
빠져있었다고 말하기도 우습긴 하지만,
심각하고 무거운 영화를 보기도 싫고,
그렇다고 헐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도 원치 않는 내게,
그나마 나의 감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일본 영화였다.

그렇게 본 일본 영화 중 두 편의 작품의 원작이
서점에 놓여있는 것이다.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와 <사신치바>!
나는 이 두 영화가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이렇게 영화화가 많이 되는 것일까?
(뭐 원래도 일본은 원소스 멀티유스가 잘 발전되어 있지만)

그 작가의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다가,
드디어 <골든 슬럼버>를 집어들게 되었다.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최고봉이라는 홍보 포인트가 
정말 절절히 이해가 갔다.
일단은 재.밌.으.니.까.

애초에 재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물론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를 봤던 나로서는 뭔가
사회적인 의식을 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지만)

하지만 오락,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일단은 감시사회라는 불가능하지 않은 문제가 바로
이 소설 속에 있었다.

감시 사회 속에서 국가, 혹은 권력이 얼마나 많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우리의 미래라는 것이.

존 케네디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소설은
한 인간이 권력에 의해 어디까지 자신을 잃어버려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그 권력의 실체와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이 소설이
솔직해서 좋았다.

결국은 '살아남는 것' 
'도망'일지언정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그 소설이 좋았다.

그 소설이 소설 속에서 말했듯이
<마이너리티 리포트> <본 얼티메이텀> 같은 영화와 같이 
누명을 입은 주인공의 영웅적인 복수처럼
끝을 맺었더라면 이것은 그저 소설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그저 개인으로 스스로의 살 길을 찾아간 주인공이 있었기에,
이 소설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물론 중간에 살인자와의 공조(?) 부분에서는 꽤나 소설틱한 느낌이 있어지만)

그리고, 그런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외에 
좋았던 것은,
청춘, 추억을 말하고 있다는 거.
삶이라는 이름 속에서 잊고 살았던 추억을 끄집어 낸다는 것.
그것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날을 추억하는 
비틀즈의 노래 <골든 슬럼버>와 닮아 있다.

나도 언제가는 그들을 기억하게 될까.
내 청춘을.
내 청춘에 함께 해준 친구들을.

이 작가.
음악성이 뛰어나다.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에서도
극 전반에 흐르는 노래가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가 흐르는데
<골든 슬럼버>도 마찬가지다.

비틀즈의 노래가 책장을 타고 흘러내린다.
<골든 슬럼버> 외에도 <Help> 등도.
책을 읽고 있는데,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효과가 이 작가의 또 다른 매력 중 하나가 아닐가 싶다.

아무래도,
이 작가의 책을 다 읽어봐야 겠다.

 

관람일자: 2009년 4월 11일
장소: 대학로 예술마당



이미 한 번 본적이 있는 뮤지컬이었다.
어느해 겨울,
친구들과 함께 봤었던.
참 많이 웃었고, 조금은 울었던 것 같다.
공연을 보고 난 후 몰려드는 유쾌함이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뮤지컬을 함께 보고 난 친구들과 김치찌개를 먹으며,
한국인의 정서를 잘 파악한 소극장 뮤지컬이라고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시간이 1여년 넘은 지금,
그저 재밌고, 감동적이고, 유쾌했다는 사실 외에는
뮤지컬 넘버도 그렇고, 구체적인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의 감동은 딱 거기까지 였던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친구 K양과 함께 하는 공연에 이것을 선택한 것은,
이 공연을 본 대부분의 친구들이 재밌었다는 평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다.

일단, 최악의 관객!
호응이 이토록 없는 관객은 처음이다.
나 역시 그렇게 선동적인 관객은 되지 못한 지라,
박수를 치고 싶은데 그 고요속에서 먼저 칠 용기는 없고,
속터져 죽는 줄 알았다.
게다가 뒤에서 계속 부스럭 무엇인가를 꺼내 드시는 듯한
아저씨 아주머니 커플.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지
공연에 집중하기도 어려웠고,
가물 가물한 기억에도 이전에 봤던 공연보다
배우들의 노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내용은,
그전에도 그렇듯,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

딱 나를 미치게 만들 결정적인 배우를 발견한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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