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 2009 8 9

공연장: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좋은 공연을 보고 온 날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괜히 웃음이 난다. 기분이 마구 마구 좋아진다. 오늘 역시 그렇게 가슴이 설렜다. 요즘은 보는 것마다 대박이다.

 

연극 <39계단>. 꽤나 오래 전 역사 내에 붙어 있는 광고물을 보고 이 연극에 관심이 생겼다.(아마도 초연 때였던 것 같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연극화했다는 것과 코믹 스릴러라는 장르가 내 눈길을 끌었었다. 하지만 <39계단>을 보겠다는 것은 마음 뿐 그냥 그렇게 놓쳐버렸다.

 

그러다 다시금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볼 수 있는^^;;;; 나는야 가난한 워킹푸어족ㅠ 8 30일까지 공연이기에 더 이상 늦출 수 없었고, 결국 일요일 20% 할인과 사랑티켓 7,000원의 할인을 받아 관람을 하기로 결정했다.

 

보고 싶은 영화나 연극의 경우에는 사전 정보를 그리 많이 얻지 않는다. 그냥 보는 순간의 느낌을 믿으려고. 이 작품의 경우에도 그저 예매처에 기재되어 있는 정보만을 보았다. 네 명의 배우가 나온다는 것. 그리고 소품 활용도가 최고라는 것들. 그리고 재밌다는 것.

 

일단, 정말 재미있었다. 특히 1막의 경우에는 최고였다. 배우들의 연기도, 대사의 언어적인 재미도 훌륭했다. 또한 무대가 주는 재미 역시 놓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동안 연극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아이러니에 빠져있었다. 연극이기 때문에 연극적일 수 밖에 없지만 그 연극적임이 마치 거짓과 같이 느껴졌었다. 연기를 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는 그 순간, 관객은 그 무대 위의 세계로 흡입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연극을 보다가도 싸우는 장면들에서는 어느 정도의 맞춰져 있는 각본을 보게 되고 그 순간 사람들은 실소를 내뿜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연극이 갖는 한계점을 느끼기도 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었고, 나의 편협하고 얕은 지식의 한계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그런 나의 생각들이 후자의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 연극 <39계단>을 통해서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연극이라는 것을 일부만을 보고 살아왔는지, 연극에 대해서 얼마나 작은 세계를 맛보았는지, 얼마나 조금 밖에 작품들을 경험하지 못했는지, 오늘 처절하게 깨달았다.

 

<39계단>은 연극이 가지는 무한한 상상력을 보여줬다. 연극적이라는 말이 갖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 연극이 연극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현실세계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 혹은 영화에서 배경 없이 불가능한 것들, 그것들이 연극에서는 가능하다. 소품 하나, 대사 한 마디로 무대는 런던이 되었다가 스코틀랜드가 되었다가 기차가 되었다가 호텔이 될 수도 있다.

 

그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완벽하게 표현하는 연극을 보지 못해서(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많은 작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극적이라는 단어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품으로 몸으로, 연기로 연극적을 훌륭하게 수행해주었다. 이 작품은 4명의 배우가 39개의 배역을 소화해 낸다. (그 중에는 인간이 아닌 배역도 있다) 그리고 무대 위에 기차도 등장한다. 그것도 아주 기발하게. 멀티맨 1 2는 쉴새없이 그들의 배역을 바꾸어 댄다. 무대 위에서 모자 하나 만으로도.

 

연극이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할 그 모습에 사람들은 인위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연극적인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 역시 너무나 훌륭했는데, 기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 몸으로 그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들이 너무나 좋았다.

 



삶이 지루해서 견딜 수 없는 37세 독신남! 리차드 해니. 그가 갑자기 어느 사건에 휘말리면서 살인 누명을 쓰고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누명을 벗고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떠난 길에서 해니는 미모의 여인 파멜라를 만나게 되는데

 

연극 <39계단>에는 서사가 있고, 로맨스가 있고, 유머가 있다. 1막에 비해 2막은 속도감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나, 그래도 초점을 스릴러가 아닌 로맨스에 맞춘다면 꽤나 흥미진진해진다. 연극이 이렇게 까지 스펙터클한 서사를 띌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정말 그야 말로 복합 장르.

 

연극을 다 보고 나서 프로그램 북을 읽으며 안 사실이지만, 이 연극은 히치콕의 영화 <39계단>을 연극화 시키는 과정을 다룬 연극이라고 한다. 연극에서 그런 장면들이 몇 장면 나왔지만 보면서도 나는 그저 연극이기에 가능한 장면들이구나 라고 생각했지, 연극화 시키는 과정 자체를 다룬 극중 극이라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었다. 아직도 (당연하지만) 나의 내공이 많이 부족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간에 해니가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소고기 수입에 관한 발언도 좋았지만, 이렇게 좋은 연극에 빈 자리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발언. 솔직히 너무나 좋았다. 이렇게 좋은 연극.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 이렇게 좋은 연극을.

 

나도 더 많은 연극을 보고 싶다. 마지막에 배우 사인회가 있었다. 사실 그런 거 조금 관심없는데 그냥, 받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에게 잘 봤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으니까. 그 말이, 연극을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재미있게 봤습니다. 너무 좋은 연극이었습니다.

 

배우들이 누구 하나 부족한 사람 없이 자신들의 역을 너무나 훌륭하게 수행해주었다. 작품이 너무나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무대 활용도 역시 최고였다. 행복한 작품이었다.

 

지루한 일상, 외로워하던 해니의 첫 대사들. 요즘의 내 일상과 같아서. (지루하지는 않지만, 외로운) 살짝, 아주 살짝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해니가 그렇게 스펙터클한 사건을 만나서 헤쳐나갈 때, 나 역시도 조금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해니가 사랑을 만났을 때, 나도 그렇게 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 그런 사족으로 이 기나긴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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