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렇게'빠순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날이 올 줄 몰랐다. 그리고, 이 '하늘보기'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무도'를 넣게 될지도 몰랐다. '무도'에 대해서는 이제 버릴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무한 애정을 갖고는 잊지만, 아직 하늘이라고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하늘보기'에는 '장진 감독님', 그리고 '도모토 쯔요시'군 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물며 사람이 아닌 예능프로그램이 '하늘'에 자리잡게 되는 오늘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사랑해왔고, 내 인생의 드라마라고 여겨졌던 '드라마'들 조차 침범할 수 없었던 영역을 오늘 '무한도전'이 넘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소리소문없는 침범에 나는 두손 들고, 어떠한 저항도 할 수가 없다. 이런 기분은 알바를 하던 회사에서 '레인특집'을 보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해!요! 무한도전!'을 외쳤던 그 날,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자막을 보면서 방바닥을 굴렀던 좀비특집 '28년 후' 이후 오랜만이다.

물로 그 중간 중간에 '여드름 브레이크' 등 레전드 급이 있었지만, 또 오늘처럼 가슴이 벅차오르기는....! 예능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나. 그리고 지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 그리고 예능 역시 '느낌표'처럼 교훈을 수반하고 있어야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착각하고 살아왔던 나. 슬랩스틱 코미디는 수준이 낮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던 나. 그런 나의 편견을 깨고, 보이지 않게 스스로를 가둬놓고 있던 선을 넘어서게 해준 <무한도전>!

무도의 팬이 되기 시작한 것은 '아하 게임'이 한참 무르익기 시작했던 2005년의 그 어느때. 아하 게임보다도 그들의 앙케이트에 더 끌렸었던 것 같다. 순위를 매길 때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제발~'을 연신 외쳐대던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매주 챙겨봐야만 하는 프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 번 두 번. 나는 그들에게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잘 챙겨보지만 굳이 못 본 것을 찾아보지는 않는 애정 정도로 시작했던 무한도전은 슈퍼모델특집을 계기로 내 마음속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게 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정점을 찍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빨리 친해지기 바래' '형돈아 놀자' 등 미친듯이 사랑했던 회차가 있긴하지만, 매주 챙겨보게 된 것은 2006년 말! 나는 평균 이하의 남자를 자처했던 그들에게 평균 이상의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한주도 빼먹지 않고, 혹시 일이 있어서 못 본 날은 꼭 챙겨볼 정도로 무한도전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삶 안에서 한국 예능은 '무한도전'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고 생각한다. 무한도전이 100%의 리얼버라이어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간 리얼버라이어티의 시초인 것 확실하다. 이전까지 방송에서 무대와 제작현장의 경계는 너무나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스태프들은 카메라가 자칫 자신들을 비출 때면 고개를 숙여 숨기에 급급했다. 무도가 리얼인것은 정말 리얼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작 현장을 고스란히 카메라 안에 담았기 때문이다. 타 방송사나 타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언급하는 것이 이유도 모르게 금기시 되었던 제작 현장에 바로 상대 프로그램의 '빛나라 지식별'을 패러디하고, 타 방송사에서 하차한 것에 대한 인사를 하고. PD가 자막을 통해 프로그램에 직접 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무도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하나 하나의 틀을 깨고 있는 무도가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절정으로 무도를 '사랑'의 경지로 오르게 한 것은 위에도 언급한 바 있는 '레인 특집'이었다. 일명 모내기 특집. 모내기를 하러 간 그들. 하지만 엄청난 폭우로 기존에 기획했던 진행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엉겹결에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임들을 하기 시작한다. 논두렁 달리기 게임, 쭉정이 뽑기(?) 게임 등. 그들이 몸개그라 말하는 슬랩스틱 코미디 작렬.

\솔직히 그 이전 까지는 무도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가끔씩 나오는 폭력적인 장면들(지금은 절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예를 들어 하찮은 형이 뺨을 때리거나 킥을 날리는 장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아이들이 따라할 텐데 라는 걱정으로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 논두렁의 몸개그들은 아무리 내가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 잘 웃을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할 지라도 빵빵 터졌다. 그렇게 웃으면서도 '내가 이런거에 웃는 아이가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쭉정이 뽑기 게임에서 홍철의 구렛나루를 뽑고 허탈하게 앉아서 '이게 웃길까'라고 말하더 도니. 그리고 뜨는 자막 '나도 걱정했는데, 웃기더라'! 그 자막을 보면서, 웃겨서 웃고 있는데, 웃고 있는 걸 걱정하는 내가 순간 한심하게 느껴졌다. 웃긴 걸 보면서 웃지 않는게 한심한 거지, 웃긴 걸 보면서 웃는 건 당연하다고 그날의 무도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더욱이 메이킹 필름처럼 이어진 마지막 영상은 방송은 단순하게 연예인 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아 더욱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정말 완벽하게 무도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 사랑은 무도가 비판과 논란의 중심에 섰을 때는 더욱더 단단해졌다. 무성의함으로 논란이 되었던 28년 후.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재 촬영을 할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연출을 통해 하나의 영화 예고편처럼 만들어 놓은 그들의 연출력에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리얼버라이어티를 외쳐대던 그들에게 재촬영을 한다는 것은 수백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된 상태에서 눈가리고 아웅밖에는 안되겠지만! 나는 그들이 할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찾아낸 또 다른 방법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기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그 실패를 영화 소개라는 방법으로 너무나 훌륭하게 성공으로 만들어 냈다. 많은 이들의 눈에는 시청자를 기만한 것 처럼 보였지만 내 눈에는 그들의 진심을 가지고 최선의 방법으로 최고의 노력을 한 것처럼 보였다.

이번 식객 편의 정준하 논란, 무한도전에 대한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식객 뉴욕 1편을 보면서 솔직히 또 쩌리짱이 논란의 중심에 서겠군 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보일 일. 하지만 그저 마음을 주면, 앞뒤양옆 안가리고 좋아하게되는 증상 때문에 쩌리짱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무도를 보아오면서 쩌리짱은 불평불만이 조금 많은 사람. 철이 없는 사람으로 내게 인식되었기 때문에. 하지만 한 편으로 제작진도 이 영상이 뜨면 쩌리짱이 논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텐데 왜 이렇게 편집을 했을 지, 조금 의아함이 들기도 했다. 첫째는 쩌리짱이 정말 잘못을 했기 때문에, 둘째는 정말 아무일도 아닌 것일 수 있기때문에, 셋째는 쩌리짱이 조금 잘못을 하기는 했지만 큰 일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세번째로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도가 좋으니까(쩌리짱이 좋아서는 아니다) 명 쉐프도 곱게는 보이지가 않았다. 쩌리짱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쌍방과실 정도. 하지만 그건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가벼운 트러블일 뿐이라고. (명셰프에 대해 느낀 부분들은 적지 않기로 하겠다) 그리고 이어진 타블로 형의 발언에 대한 논란. 타블로의 형이 한 말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리고 물론 그가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자유롭게 쓸 자유는 있다. 물론 그가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이며, 한 연예인의 형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그의 글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무도'답다. 라는 네 글자를. 무도이기때문에. 라는 일곱 글자를. 무도가 아닌 다른 프로그램에서 그랬더라면 나는 그들이 부끄럽다고 생각했을까? 무도이끼 때문에 내가 용납이 되는 일인 것일까? 그런데, 이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무도가 아니라면 어느 방송도 그렇게 진행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도 영어 울렁증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봐온 그들을 아는데, 그들의 울렁증으로 그렇게 제작진의 도움 없이(물론 어느정도의 도움은 있었겠지만) 방치되어 스스로의 길을 찾는 그들의 모습. 나는 그들이 너무 기특했다. 얼마나 어렵고 쪽팔리는 일을 저들이 하고 있는지를 알기에. 그들이라고 해서 왜 부끄러움을 모르겠는가. 그들도 사람이고, 더욱이 한국에서는 다들 한 이름 하는 분들인데. 하지만 그런 그들이 몸을 낮추고 그곳에서 부끄러움을 이기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모습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단순히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면, 저들이 저렇게 까지 할 수 있을까?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는다. 무한도전이라는 이 네 글자가 중요한 것이다. 미숙한 점도 있었을 수 있고, 기획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간 부분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한도전이다. 완벽할 때도 무한도전, 완벽하지 않을때도 무한도전이다.

오늘 무한도전을 보면서, 또 마지막 '미안한디 미안하다'송을 들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이들과 사랑에 빠졌다. 갑자기 뜬금없이 음악이 나왔을 때, 편집 분량이 모자란가?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가사를 들으며, 다시금 터져나오는 탄성. 역시! 자신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에 즉각적인 피드백이 있는 방송. 자. 어떻게 이런 방송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몇번이나 더 이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까.

그래, 나 무도 빠순이다!


삼만카페에서 이름을 넣으면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이트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한번 재미삼아 넣어보았는데.

http://kr.miraino.jp/

헉.

아는 자만 웃어라.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전화는 무엇일까?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전화?
혹은 누군가의 사고를 알리는 전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전화는,
대답도 없고 침묵도 없는 전화일지도 모른다.

참 나쁘구나.
아니, 조금 밉구나.

잘못 눌려버린 통화버튼.
아무리 불러봐도,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나를 찾는 목소리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웃고 떠들고, 그 순간을 즐기고 있는 누군가들의 목소리.

그 누군가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나는,
그들이 알고 있는 수화기 밖의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버리는 순간.

누군가를 상처입히려는 의도없이,
상처주는 순간.
상처입으려는 마음 없이, 상처받아버리는 순간.

이 순간을 상처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고 우습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런 거거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이 되는 나날들이 있다.
그저 한 걸음 떼는 것조차 크나큰 용기가 필요한 날이 있다.
그렇게 자꾸만 자꾸만 뒷걸음을 치고 싶은 나날들 있다.

그런 나날들에,
이런 일은,
웃고 지나쳐 버리기에는,
참 아프다.

많이 나약해졌구나.
많이 솔직해졌구나.
먆이 용감해졌구나.
많이 외로워졌구나.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오빠 :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보고(영화보고 읽어라)

개봉 첫 날 본 첫 영화인 듯.
개인적으로 김진명씨가 잠깐 떠 올랐다.
장진 감독 역시 초기 작품에 비해
이번 작품에서는 힘이 많이 딸리는 듯한 인상이 들었다.

1.

“소재”와 “전하려는 메시지” 사이의 상관성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내내 흐르는 주제의식이 뭔지는 알겠지만,
대통령이라는 소재가 갖는 특수성을 적절하게 결부시켰는지 의문이 든다.
특히나 정치의 희화화나 인간의 보편성, 행복의 소중함
어느 것 하나 임팩트(장진영화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을 기준으로)있게 묘사되지 못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영화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주제/분위기가 있었냐는 의문도 들고. 

떡복기, 귀향, 땅투기, 한일관계 이 정도로는 약했다.
어쩌면 대통령을 둘러싼 우리의 현실정치가
더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이 영화의 기획 및 제작이 이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영화를 웃으며 보기엔
이명박 대통령의 재임 첫/둘째 해의 행보에 대한 걱정과
그리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너무 너무 크지 않나 싶다.

 2.

캐스팅과 관련 해서는 한채영 한 명 빼고는 OK
배우들의 연기와 관련 해서도 한채영 한 명 빼고는 OK
그 정도면 모두들 최선을 다했다. 

장동건의 캐스팅이 맞느냐?를 고민했지만,
별도의 답이 없다는 것이
이 영화를 안타깝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반면 이문수씨의 캐스팅은 너무나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기/차차기 작품에서 약간에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면,
변희봉 선생님 정도의 또 한명의 배우를
한국영화가 얻을 수 있지 않나 싶다.(이미 정말 대단하신 분 이지만)

 까메오들 역시 자신들의 내공을 250% 발휘했다. 공형진, 류승룡..

3.

마지막 왈츠 장면에서 음악을 넣냐 넣지 않냐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영화 막 끝났을 때는 아쉬운 느낌이었지만,
(마더의 갈대+김혜자+음악이 최근 머리 속에 너무 인상 깊었던 탓에)
연구실 돌아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어떠한 음악이 들어갔다면 너무 작위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주제의식을 깨는 것은 물론….

음악이 안 들어간 것 그리고 카메라 워킹을 화려하게 하지 않은 것
그것이 장진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4.

장진감독 고정팬 +100만
경쟁작 부재 +200만
장동건 티켓파워 +100만
작금의 정치현실에 대한 묘사력과 주제의식에 대한 연출력 비판 -50만
350만명 정도????????????????????????

동생 Re:굿모닝 프레지던트를 보고(영화보고 읽어라)

잘 읽었다_
삶에 찌들어 그토록 좋아했던 장진 감독님조차도 잊고 사는 듯한 나날이었다.
만날 장진 감독님 작품을 보기도 전에,
개요만으로도 흥분하고,
시사회 3개정도는 당첨되어 주는 게 진정한 팬이라고 생각하던 나날들이 있었는데_
가끔씩 TV를 통해, 포털 사이트를 통해 흘러나오는
영화 이야기에도 흘깃, 할뿐 솔깃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무가지에 실린 전면 광고.
이런 홍보 문구가 있더군.
"장진 감독님의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

그 글귀를 읽는 순간,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나 역시 개봉 이틀 정도가 지나고,
이 영화를 봤다.
큰 기대를 안하고 봐서 그런지
실망이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쉬움은 어찌할 도리가 없더라.

오빠의 말에 백번 공감한다.
그동안의 장진스러움을 많이 찾아 볼 수 없는 영화였다.
박쥐를 보면서,
나는 그 영화가 박찬욱 이상의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박쥐=박찬욱 자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진 않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장진 이하였다.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으니까.

소소한 재미는 있었지만,
장진 감독 특유의 위트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상황 설정은 괜찮았으나,(절대 좋았으나는 아니다)
장진 감독 특유의 이야기를 펼쳐놓고, 다시 주워담는 스타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너무 착하고, 너무 따뜻하고, 너무 교훈적이고,
쉽게 웃기고, 쉽게 즐거운,
그런 온도는 싫다고.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아쉽고도 아쉽지만
하지만 그 누구도 나 처럼 맹목적인 믿음으로,
그리고 오빠처럼 분석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을테니까.
실패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하지만
오빠가 이 영화를 보고 웃을 수 없었다면,
그래도 오빠는 이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이다.

나는 장진 감독이 웃으라고 이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오빠처럼
지금 현시대를, 그리고 잊혀져가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떠올리기 바라면서 만들었다고 믿고 있으니까.
(실제적으로 장진 감독님은 블로그를 통해 그런 기획의도를 밝힌 바 있다)

오빠같은 관객이 있어서,
나는 이 영화에 그나마의 의미를 갖는다.
참고적으로 나는 그런 관객이 되지 못했다.
감독님의 의도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그냥 웃고 끝났으니까
 
캐스팅에 관해서는,
나는 솔직히 장동건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것이 어쩌면 성별에 따른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장동건을 보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스크린을 보면서 진짜 잘생겼다고 생각한
딱 2명의 인물 중 하나.

나는 장동건의 캐스팅을 좋게 생각한다.
그것은 연기의 문제를 떠나서,
장진 감독님은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유리벽을 허물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무게감과 카리스마 가득했던 신현준을 킬러들의 수다로 기봉이의 역할을 해 줬던 사람도,
장진 감독이었으며,
신비주의 스타 원빈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도 장진 감독이었다.
난 실제로 이 작품을 통해 성역같이 느껴지던 장동건이
조금은 편안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이문수 아저씨는 <거룩한 계보>때부터 눈에 들어왔는데,
오빠의 의견에 쉽게 동조할 수는 없겠다.
이문수 아저씨가 대단해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기 보다,
나에게는 그렇게 큰 임팩트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는 변희봉 선생님께 느끼는 감정과도 유사하다.
변희봉 아저씨의 기사를 보고는 대단해보인 적이 있어도,
연기를 보고 감탄을 해본 적은 없다.

오히려, 윤주상 아저씨가 나는 좋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마지막 왈츠 장면에 음악에 대한 오빠의 고민을 보면서,
참으로 분석적으로 영화를 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거다.
나는 음악에 대한 생각까지는 하지도 못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갈등이 풀리고 화해하는 그 장면 자체가
너무 따뜻한 것만 같아서,
나는 좋지가 않았다.
그랬기에 음악 등은 당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영화의 그 장면과 마더의 장면을 비교한 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 중 하나이다.
이유는. 상상에 맡긴다.

오빠가 예상한 100만 장진감독의 고정팬으로
나는 절대 흥행률을 수치로 계산할 순 없지만,
이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영화 하나로
장진 감독님이 인식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비주류였던 장진 감독님이 주류가 되어 서 계시다.
나는 그게 한없이 슬프다가도 한 없이 기쁘다.
장진 감독님과 영화들은 비평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그냥 무조건.
무조건이라는 세글자를 그 분께는 안고 살고 싶다.

더불어 오빠에게,
<릴리슈슈의 모든 것>과 미셀공드리의 영화들을 추천한다.

이상 끝.


지난 주 금요일부터,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내 몸이 70%의 수분이 아니라, 70%의 외로움으로 이뤄진 것 마냥.
견딜 수 없는 지극한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뭐, 그래서,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질병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에 대해서 말을 하고 싶었다.

회사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는 상황 속에서,
가위에 손을 베었을 때,
정말 피가 뚝뚝 떨어진다는 말을 느낄 수 있었는데,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은행에 간다고 하며,
근처 약국에 가서 응급처치를 했었다.

사촌 언니의 신혼집을 처음으로 방문하던 날,
복통에 시달려 한숨도 못 자며, 고통스러워 했을 때,
사촌 언니 옆에서 자고 있었으면서도,
홀로 그 고통을 모두 이겨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에서야 병원에 가서,
오한과 발열이 수반된 세균성 장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1시간 동안 수액을 맞아야만 했다.

그게 나다.
그게 나다.

아파도 홀로 참아보는 게 나다.
어쩌면 미련한 것이다.
아니다.
진실로 미련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나다.
이런 나를,

이런 나를,
이런 나를,
이런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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