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04. 04. / 상암 CGV

 

 

 

 

얼마 전 친구가 <그녀가 떠날 때> 시사회 표가 생겼다고 함께 보러 가자고 했다. 어떤 영화인가 살짝 정보를 찾아 보았다. 내 스타일인 듯 했지만 시간이 되지 않아 아쉽게 거절을 하고 말았다. 그 뒤로 몇 번을 볼까 말까 고민했는데, 솔직히 미친 듯이 당기지가 않았다. 내 스타일이고 해놓고 당기지 않는다니, 모순일 수밖에 없지만 깨나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하고 우울할 것만 같아서 쉽게 손이 가지 않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봐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영화. <그녀가 떠날 때>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그러던 중 다른 친구가 그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고, 함께라면 조금은 쉽지 않을까 하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는 이스탄불에 살고 있는 우마이가 낙태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우마이는 아들을 데리고 독일에 있는 친정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부모님도 오빠도 이혼을 원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관습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나는 솔직히 처음에는 친정을 찾아간 우마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싶다면 스스로 방법을 구해야 한다며, 친정에 머물려 하는 것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 그들에게 이해를 구걸해야 하는지, 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냐며 가족에게 화를 내는지이해할 수 없다고 여겼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을 이해시키려 하기 보다는 그저 그곳을 나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 올바르다 여겼다.

 

나는 가족을 믿지 않는다.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나름 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자부하는 나이지만…. 이상하게 나는 가족주의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도 싫고,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싶고,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싫다. 그런 내가 우마이를 보고 있으니 답답한 생각을 들 수밖에.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모두가 욕을 해도 나를 이해해줄 단 하나의 집단, 가족. 결국 가족한테만큼은 이해 받고 싶고, 위로 받고 싶고, 상처를 어루만짐 당하고 싶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얻고 싶은 거였을 거라고. 나 역시 가족주의가 싫다 말해도 결국 힘이 들거나 지칠 때, 돌아가는 곳은 부모님의 품이니까.

 

그리고 우마이가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도 별로였다. 형제에게 맞고 나서, 또 찾아가는 곳이 사랑하는 남자의 집이다.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왜 또 다른 남자에게 위로 받고 의지를 해야 하는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영원히 남자를 적대시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너무 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것도 가족과 마찬가지로 좀더 영화를 보니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단지 남자에 의존을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데 적당한 시간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 누군가의 엄마이기 때문에, 이혼을 했기 때문에 사랑에 겁내 하고, 좀더 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토를 달게 만들었으나 결국은 나를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삶을 응원하고 싶었다. 이혼한 딸 때문에 직장 내에서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견뎌야 하는 아버지와 파혼을 당한 여동생. 그런 여동생의 결혼을 돈으로 성사시키는 아버지. 그 결혼식 장에 가서 내쳐지고, 왜 자신은 이모의 결혼을 축하해줄 수 없냐는 아들의 말에 다시 그곳을 찾아가 울부짖으며 이야기 하는 우마이.

 

그녀의 행동에 같이 울었다. 그녀가 맞을 때 내가 맞는 것처럼 아팠다. 불편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결국 오래된 관습을 선택한 아버지와 두 아들. 과연 그들일 지키려고 했던 명예라는 게 무엇이길래. 누구도 원치 않았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나를 절규하게 만들었다.

 

목구멍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건, 오빠건, 동생이건, 전 남편이건, 심지어 사랑에 빠진 남자라도 상관 없었다.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알고 있다. 이건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명예 살인이라는 관습을 가지고 있는 한 사회의 관습과 또한 커뮤니티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영화라는 것. 하지만 그 안에서 언제나 약자는 여성일 수밖에 없다는 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창 밖을 바라보며 사내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가 사내였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었을 테니까.

 

그녀와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의 결정에 반대를 했던 남동생만 해도 그랬다. 나는 그 남동생이 결국 방아쇠를 잡아 당기지 않았지만 결국은 그 사회 안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될 거라는 게 겁이 났다. 사회와 관습은 그렇게 유지가 되는 거니까. 폭력적인 아버지를 보면서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는 사람이 아버지를 담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변화해야 하며, 아주 작은 것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내게 그런 관심을 촉구하게 만들었다. 그런 관심이 있는 나라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게 어떤 나라였는지 조차 모른 채 무지했던 내게. 무심함 속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법을 잃어가고 있던 내게 그 감정들을 일깨워줬으니.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 아닐까.

 

2012.04.05 / 건대 롯데시네마

 

 

 

 

어딘서가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의 합창단 창단기를 다룬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국악을 베이스로 한 음악영화라. 살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트위터에서 시사회 이벤트를 발견했고, 당당히 선착순 안에 입성! 시사회는 낮 4 30분이었는데, 아무래도 친구들은 다 직장인이다 보니 함께 갈 사람이…. 없어서 쓸쓸히 홀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표를 찾는데, 언론 시사회를 겸해서 그런지 OST CD도 나눠주었다. 왠지 기분이 두 배로 좋아졌고,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따라서 높아졌다.

 

...

 

영화가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한 것 같다. 사실 영화의 기능이 무엇일까. 영화를 보고 자신의 무언가를 떠올리고 추억하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 <두레 소리>는 나의 고등학교 동아리를 생각나게 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당시의 사람들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선생님들, 동기들, 후배들. 그리고 그때 그 시간.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전문 배우들과 아마추어 배우들이 함께 출연한다. 이 부분이 문제였던 것 같다. 아마추어의 연기로 극영화를 만들려니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문 배우들이 등장할 때와 아마추어 배우들이 연기할 때의 갭도 너무나 컸고. 극영화라고 해야할 지, 다큐멘터리라고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내가 영화적인 이론이 부족해서 이 영화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보기에 편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스...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하고 통속적인 이야기들이다. 합창단이 생기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불협화음을 내다가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되지만 학교의 방해로 인해서 위기를 맞이하고 등등등. 어디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이야기. 주인공이 되는 두 친구들의 갈등 소재도 그렇다. 그들이 갖고 있는 개인적인 고민들을 다루는 것은 좋은데, 거기에 왜 꼭 그런 뻔한 갈등이, 어색하게 들어가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나 역시 두레소리와 유사한 과정을 겪었다. 선후배간의 갈등 때문에 동아리가 와해될 뻔 한 적도 있고, 학교와 동아리 간의 갈등 때문에 동아리의 존폐 위기에 처해본 적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내가 졸업한 이후에 후배들이 한 작품이지만) 그렇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공감이 되기는 했으나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 영화가 평범한 이야기를 가지고도 특별해지기를 꿈꿨던 것은 아마도 그것이 국악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고 생각한다. 영화 전반에 흐르고 있는 그들의 음악은 굉장히 좋았다. 공연 장면 역시나 좋았고. (학교에서 처음으로 선생님들을 앞에 두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서…. 선생님이 막 눈물을 보이는 장면은, 감정과잉이었다. 관객은 그 정도의 감동을 받지 않았는데, 배우가 막 울고 있으면 오히려 받은 감동마저도 반감이 된다. 나만 그런 건지는 몰라도.)

 

오히려 이 영화가 국악에 좀더 초첨을 맞췄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선생님이 술을 마시면서 유학을 갔을 때, 외국인 친구가 너는 왜 너희의 음악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다고 말하는 장면. 나는 이 영화의 핵심은 그 장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악을 해서 자신이들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장면. 그 장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설픈 우정이 아니라, 국악에 대한 고민이 이 영화가 더 진정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됐을 것이다.

 

귀는 즐거웠지만, 추억이 꿈틀거렸지만….

눈은 집중하기 어려웠던 그런 영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 시사회로 보고 왔기 때문에 사실 좋은 말들을 많이 쓰고 싶었는데쓰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아쉬움의 소리다. 좋은 소재의 영화가 좀 더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다양성을 충족시켜주는 영화는 되었으나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는 아닌 듯함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2012.04.05 / 압구정 CGV

 

 

 

내가 미타니 코키 감독을 좋아하긴 좋아하나 보다. 우연히 트위터에서 미타니 코키 감독님의 신작 영화 <멋진 악몽> 유료 시사회 때 후카츠 에리 상과 미타니 코키 감독의 무대 인사가 있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사실 약속이 잡혀 있는 날이었는데, 순간 약속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좌석을 예약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실 지금까지 어떤 영화가 기다려져서 유료 시사회를 예매하는 일 따위는 없었는데.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라면 이벤트를 통해 시사회 3개쯤은 당첨되는 열의가 필요하다고 믿어왔다. 그런 내가무대 인사에 혹해서 유료 시사회라니. 미타니 코키 감독님이 <도모토 쿄다이>에 나와서 노래 부르는 모습만 보지 않았어도, 내가 그분을 좀 덜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타니 코키 감독을 처음 알게 된 건 <매직아워>. 집에서 보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 뒤에 본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는 지금도 종종 꺼내보는 영화다. 그 영화를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뒤 <모두의 집> <더 우쵸우텐 호텔> 등 미타니 코키의 영화는 대부분 챙겨봤고, 한국에서 상연되는 연극 <웃음의 대학> <너와 함께라면> 등도 너무 재밌게 봤다. 특히나 <웃음의 대학>은 너무나 좋아해 영화로도 보고, 연극으로도 몇 번이나 봤다.

 

기본적으로 미타니 코키 감독의 시추에이션 코미디가 내 성향에 맞는다. 배경이 화려하진 않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도 좋고, 캐릭터도 마음에 들며, 정곡을 찌르는 타이밍 쥑이는 대사들은 정말 나를 쓰러지게 만든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면 코미디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가 가능한 것도 부럽다. <신선조>라는 드라마를 살짝 봤었는데, 시대극인데도 불구하고 조금 재미 있게 봤다.(물론 다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나중에 이 <신선조>의 각본도 미타니 코키 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좀 더 대단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 나의 애정도에 방점을 찍은 것은 위에서도 밝혔다시피 토크쇼 <도모토 쿄다이>에 게스트로 나왔을 때다. 음치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던 모습에 살짝 반해버리고 말았다.

 

감독님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가 길었는데, 다시 <멋진 악몽>으로 돌아가 보자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 잠깐의 무대 인사가 있었다. 유료 시사회가 처음이었는데, 확실히 일반 시사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돈을 지불하고라도 먼저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이 미타니 코키 감독이나 후카츠 에리 상, 혹은 일본 영화의 팬이었다. (역시나 어쩔 수 없이 후카츠 에리 상의 팬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관객 사이에도 일종의 연대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들에게 꽃을 주기도 했고, 관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후카츠 에리 상은 정말 예쁘고, 천상 여배우라는 느낌이 들었다. 행동 하나하나도 어찌나 그렇게 조신하고 여성스러운지. 그리고 미타니 코키 감독은 상상 그대로 너무나 유쾌한 분이셨다. 미리 적어온 쪽지를 보면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데 자기도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단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도 한국말로 잠깐만을 외치더니 후카츠 에리 상 어깨에 손을 올리는데 어찌나 귀여우시던지. 나갈 때도통역에게 막 물어보더니 영화 재밌게 보라고 한국말로 한 마디를 덧붙이고 간다. 나도 모르게 나가는 감독님 뒷모습에 두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볼 수 있었다는 게 내게는 조금은 특별한 기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 <멋진 악몽>은 정말 초호화 군단의 출연이다. 후카츠 에리 상은 계속 언급을 했으니 넘어가고, 니시다 토시유키 아저씨. 나는 정말, 진짜, 진심으로 저 아저씨가 좋다. 미타니 코키 감독 작품을 보다가 알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정말 아저씨의 작품만 찾아서 봤을 정도. 사실 일본어를 잘 모르다 보니 연기를 잘 하는 지 못하는 지 잘 모르지만, 니시다 토시유키 아저씨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정말 감탄을 하게 된다. 그냥, 그분의 코미디 연기가 너무 따뜻하다. 웃긴데, 감동이 있다. 그 표정에서 보이는 익살스러움과 따뜻함의 공존. 이번에도 억울하게 죽은 패전무사 유령의 연기를 하는 아저씨가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보물 같은 배우, 아베 히로시. 워낙 유명한 배우인 건 알고 있었지만 좋아하게 된 건 <결혼 못하는 남자>. 근데 한 번 좋아하게 되니까, 애정이 쌓여서 그런가 볼수록 좋아진다. 이 영화 속에서도 어쩜 그리 쿨하신지. 뭐 그 외에도 쿠사나기 츠요시, 타케우치 유코 등등. (쿠사나기 츠요시가 나오는 장면마다 사람들이 하도 웃어서 조금 그랬다. 쿠사나기 츠요시는 정말 한국에서 이미지 메이킹이 잘 못된 듯하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카메오의 느낌으로 나온 분들도 대박. <매직 아워>의 사토 코이치나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의 카라사와 토시아키 님도….!!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영화를 보기 전에 전단지를 보니 미타니 월드라는 표현이 나왔다. 정말 말 그대로 미타니의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법정에 유령을 증인으로 세운다는 설정 자체가 얼마나 기발한가. 그리고 그 유령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중에 유령이 눈에 보이는 사람의 조건도 빵 터졌다. 나는 미타니 코키 감독이 좋은 이유가 심각해지지 않음이다. 어찌보면 너무 가벼워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게 좋다. 다만 추리물은 아니었으나 진범이 밝혀지는 과정이 (이 영화에서 진범을 밝혀내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유령과 사람이 갖게 되는 우정? 서로에게 용기를 얻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 주는 것. 이게 중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허술한 게 살짝 아쉽긴 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상황과 이야기로 승부를 보는 영화이다 보니 사실 넓디 넓은 스크린의 필수적인 필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처음으로 극장에서 보는 미타니 코키 감독의 영화였다. 지금까지는 항상 다운로드 받아서 집에서 모니터로 시청을 했었으니까. 그런데 <멋진 악몽>을 보면서, 오히려 그게 더 웃음을 자아내는데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극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공유하며 웃는 재미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모니터로 보면 더 몰입을 했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 개봉하고 나면, 친구들이랑 한 번쯤 더 볼 생각이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잔뜩 나온데다가 OST도 좋았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는 영화니까. 미타니 코키 감독님을 실제로 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2012 4 7일 토요일 / 스폰지 하우스 광화문

 

 

 

 

왠지 모르게 포스터가 마음에 들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좋았지만 포스터에 있는 두 명의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잘 생긴 남자와그닥 잘 생기지는 않은(?) 남자. 과연 둘 중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남자는 누구일까?

 

두둥.

 

그닥 잘 생기지 않은 남자, 바로 모리야마 미라이다. 얼마 전에 본 <모테키>라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었는데, 갑자기 몰려온 인기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하며 동정 탈출에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다. 절대 잘 생겨 보이지 않는 외모인데(순전히 내 기준에서!) 왠지 모르게마음에 들었다. 개성 있고, 연기도 잘하는 것 같고. 그런 그가 <세이지:육지의 물고기>의 포스터에 떡 하니 서 계시니, 나는 그저 이 영화를 선택할 수밖에.

 

내용을 전혀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포스터나 영화 제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자체가 재미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 혼자 볼 생각이었는데, 영화를 보러 가는 길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화에 급 일행이 생겨버렸다. 친구도 그 영화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 우리는 그렇게 광화문 스폰지 하우스로 향했다.

 

영화는 업무에 쫓기며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40대 한 남자가 우연히 받아 든 기획서를 보고 20년 전 추억을 장소를 방문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40대 남자의 20년 전 모습이 바로 모리야마 미라이다. 취업 통지서를 받아 들고 출근 전에 자전거 여행을 떠난 그는 트럭에 부딪히며 치료를 받기 위해 ‘HOUSE 475’라는 바에 들르게 된다. (그 트럭 운전사-극중 이름 카즈오-가 또 <모테키>에서 친구로 나왔던 사람이어서 살짝 또 반가운 마음!) 우연히 그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혼 후 아이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가게 여주인 쇼코’. 그리고 과묵하지만 그곳을 찾는 단골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점장(?) 세이지(니시지마 히데토시다. 정말 잘 생겼다. 정말 눈이 즐거워지는 외모와몸매였다.) 처음 여행자를 이곳으로 안내한 트럭 운전사 카즈오. 밴드를 하는 친구들이나 쇼코를 짝사랑하는 남자,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와 손녀까지.

 

사실, 영화는 생각만큼 지루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관에 와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집에서 봤다면분명큰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 스킵을 했을 확률이 크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편집들과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하늘이나 자연의 영상들은 사실 장점인지 단점인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나한테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줘서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으나 어찌 보면 어렵고 헷갈리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도 있었던 것 같다. 특히나 중간 중간 자연 장면이 너무 많이 나와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관한 그런 영화라고 착각할 뻔하기도 했다. 특히나 차에 치어 죽은 멧돼지나 동물보호협회 사람들의 등장 때문에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는 상처와 위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할아버지와 여행자가 나누는 대사 중 그런 부분이 있다. 사람들은 무심하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세이지는 무심하지 못하기에 절망에 가득 찬 거라고. 여주인인 쇼코가 세이지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그래서 더 외롭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세이지는 육지에 올라와 죽음을 기다리는 물고기 같다고.

 

그래서 소녀 리츠코가 연쇄 살인범에게 부모님과 자신의 팔 한쪽을 잃어버렸을 때, 그래서 웃지도 않고 영혼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을 지을 때, 차마 병문안을 가지 못하는 세이지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으리라. 그랬던 그가 어쩔 수 없이 리츠코를 만나러 가서 그녀를 위로해준 방법.

 

솔직히 조금 많이 울었다. 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나는 뼈 아프게 이해가 갔다.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었을 테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붕대클럽>이 많이 생각이 났다. 위로에 대한 방법. <붕대클럽>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주머니에 넣고, 눈을 가리고 학교를 가는 남자는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정말로 이해해보고 싶다고. 아마, 세이지도 그랬을 것이다. 위로라는 것은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마음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성인이 된 리츠코가 영화의 시작을 장식한 40대 남자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리츠코는 말한다. 할아버지는 그 사건 이후로 신을 원망했다고. 하지만 자신의 신은 아직 살아있다고. 그녀의 신은 세이지였으니까.

 

‘HOUSE 475’의 단골들의 소소한 이야기 하나 하나도 내게는 일상처럼 느껴져서 참 좋았고. (특히나 한량처럼 사는 카즈오가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흠뻑 맞고 나서,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들에 비해 자신이 초라해진다고 말하는 장면은 많이 아팠다. 그리고 아내가 집을 비운 중년 선생님이 술에 취해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고 읊조리며 초라하게 웅크리고 잠이 드는 모습도. 나는 이 영화의 이런 세세한 부분이 참 좋았다.) 세이지가 갖고 있던 아픔이나 쇼코의 상처도,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누구나 갖고 있는 어둠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무리 밝아보이는 사람도, 괜찮아 보이는 사람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위로, 위로, 위로.

 

언제부터 인가 위로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나. 그런 나에게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영화였다. ! 그리고 이 영화의 감독이 이세야 유스케란다. 이름만 듣고 <허니와 클로버>에 나온 배우 맞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맞단다. 잘 생긴 사람이 영화도 잘 만드는군. 내가 영화를 보기 전날에 갑자기 한국에 와서 예정에도 없던 무대 인사를 하고 갔다는데,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든다.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언젠가 다시 한번 곰곰이 곱씹어보고 싶은 그런 영화였다.


2012.03.24 / 남산예술센터




한동안 블로그를 방치해두었다.
간간히 공연도 보고,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그랬는데 이상하게 글이 써지지 않았다.
글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작품을 만나지 못한 까닭도 있지만...
그저 나는 나를 잃고 살았던 것 같다.

몇 번이나 써내려가다 채 완성하지 못하고 멈춰버린 수많은 리뷰들과 나의 일기들.
완성은 될 수 있을까.

뭐, 서론이 길어졌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시 한 번 기록해보고자 한다. 내가 살아가는 흔적을.
그래야 살아있음을 느낄 테니까.
짧아도 좋으니 남기고 싶다.
내가 무언가를 봤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도록.

결국 계속 서론이 길어지고 있는데, 오늘 공연 2편을 보았다. 우선 남산예술센터에서 한 <878 미터의 봄>. 저렴한 가격을 위해(이 놈의 돈! 돈! 돈!) 조기 예매을 해놨었다. 사실 일정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가까운 시일 안에 보는 게 아니면 잘 예매를 하지 않는다.

역시나 갑자기 회사 일이 잡혔고, 사실 취소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꽤나 고민했다. 일이 몇 시에 끝날지 몰라서. 그런데 취소 수수료도 너무 아깝고, 일단 한 번 밀어 부치자고 (아!! 맞춤법 헷갈려ㅠ) 생각했다. 다행히 일은 일찍 끝나서 남산예술센터로 고! 고! 이 놈의 날씨 날씨 날씨! 정말 남산예술센터까지 가는데 얼어 죽는 줄 알았다. 무슨 춘삼월에 그따구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건지. 무튼 그렇게 나름 우여곡절 끝에 공연장에 도착했다.

요즘 공연을 고르는 기준. 예매 사이트에 가서 포스터를 훑는다. 제목과 포스터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공연을 찍는다. 공연장과 제작진, 출연자 등을 본다. <878 미터의 봄>. 일단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공연장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조금 웃긴 얘기긴 하지만 나는 무슨 수상작, 이런 거에 좀 반응하는 편이다. 맹신하지는 않지만 조금 더 호기심이 가는 것은 사실! 벽산희곡상 당선작이라는 것이 심하게 땡기기는 했다. (예전에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되었던 차범석 희곡상 수상작 <푸르른 날에>를 재밌게 봤던 것도 이 공연 선택에 약간의 이유를 제공했다. 사실 큰 연관성은 없지만.)

나는 사회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공연을 좋아했다. (과거형인 것은 최근에는 딱히 취향이란 게 없어졌다. 공연에 대한 선호도가 아주 중구난방이다) 예술(공연)이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인간의 삶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여겼었다(한 때). 그러니 카지노로 변한 폐광촌. 막장 인생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타워크레인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 그들의 이야기가 시공간을 초월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펼쳐진다는 것이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조기 예매는 가격도 참 좋지만, 자리도 참 좋더라.(라는 또 쓸데없는 한 마디를 곁들이며) 일단 무대는 참 좋았다. 거울을 적절히 활용한 것도. 무대 전환 때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공연을 다 보고 난 후...

솔직히 뭐라고 표현을 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 의미는 있었다. 충분히. 작가의 의도도, 연출가의 의도도 알겠다. 그런데.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지, 가슴이 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공연 직후 트위터에 "연극 <878 미터의 봄>. 의미는 좋은데, 무대도 좋은데.... 이 아쉬운 마음은 뭐지? 뭔가가 살짝 불만족스럽다."라고 올렸다.

생각해보니 '감동'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감동을 받지 못했다. 그게 내 불만족의 이유였다. 개개인의 연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몰입이 되지 않았다. 왜 저 장면에서 화를 내는지 배우들에게 감정 이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연기는 좋은데, 대사 전달은 조금 명확하게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톱니 바퀴가 아주 살짝, 정말 조금 어긋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암전도 마찬가지이다. 무대 전환 방법이 나쁘지는 않았으나(오히려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나와서 다음 장면과 연결 시키 듯 무대를 전환하는 방법은 신선하고도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너무 잦았다. 전체적인 흐름이 끊기는 느낌. 중간 중간 독백을 하는 부분도... 뭔가 미묘하게 느낌이 안 산다. 솔직히 나 역시 답답한 게 , 대사도 좋고 연기도 좋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가 갸우뚱해지니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아마 공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다는... 너무 멋있게 만들려고 한 게 아니었나... 하는 그런 생각. 중간에는 살짝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라며 따라가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최종적으로 이 연극이 하고자 하는 의미는 명확하다. 우리는 878미터 아래를 혹은 타워크레인 고공을 궁금해 해야 한다는 것. 그곳을 보고(봄), 봄이 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의미는 너무 좋은데,
감동이 따라가지 못해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드는 공연이었다.

(내 앞에 관객은 어느 부분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당연히 사람에 따라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그런 관객을 보면 내 신경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짝 고민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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