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04. 02 / 씨네큐브

 

 

 

트위터를 통해 <디어 한나>에 대한 감상평 두어 개를 접했다. 별 말이 적혀 있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끌렸다. ‘보고 싶은 영화는 사전에 정보를 찾아보지 않는다!’ 라는 나의 이상한 신념에 입각하여, 더 이상의 영화평은 눈 앞에 나타나도 피해가며 영화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피할 수 없었던 것. 바로 대형 현수막 포스터였다.

 

신이 아니라당신을 보러 갔어요.”

운명을 바꾼 기적의 편지, 디어 한나.

 

과연 어떤 이야기일까 기대가 되었다. 영화의 시작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서 자신의 개를 발로 차는 남자. 그리고 슬픈 듯 그 개를 안고 걸어가는 한 남자. 그렇다. 이 영화는 분노에 가득 찬 한 남자의 이야기다.

 

아니다, 분노에 가득한 한 남자와 그런 그를 위로해주는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도 모르게 또 누군가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고 두려운 듯 어떤 가게로 들어가 행거 뒤로 숨어 버리는 남자. 그 남자를 위해 그 가게 여자는 기도를 해준다. 그때 남자의 흐느낌.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남자의 분노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남자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그때부터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시작된다. 남자는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자신의 친구를 위해 그녀에게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의 기도를 들은 사람들은 평안해진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영화는 여자가 남자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이야기인줄 알았다.

 

하지만 평온하고 밝아만 보이는 여자의 상처와 아픔, 분노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정말, 요즘 보는 영화마다 왜 이렇게 비정상적인 남자들이 많은 건지. 화가 나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더욱 더 분노하는 건 그게 비단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내에게 성적인, 육체적인 폭력을 행사하며, 다음 날이면 자신에게 병이 있는 거라고 용서를 빌면서 사랑을 말하는 남편. 정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DV(가정폭력)를 행사하는 놈들의 패턴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른다.

 

나는 이 시점에서 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영화를 볼 때 나쁜 습관인지 좋은 습관인지 모르겠으나 자꾸만 내 멋대로 결말을 상상해버린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끊임없이 추측하고 상상한다. 남자가 <그랜토리노>의 결말처럼 하는 것은 아닐까그런 생각을 해봤다. 여자에게 계속되는 남편의 폭력 문제뿐 아니라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옆집 아이의 문제도 있었으니까. 엄마가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오면 거리에 나와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아이. 엄마의 남자 친구는 개 한마리를 데려와 아이를 겁준다. 그 두 가지 사건들이 겹쳐지면서 나는 어쩌면 남자가 행동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나의 상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결말을 맺게 된다. 분노가 폭발해버린 것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 자신의 죄를 들켜버린 여자가 남자 앞에서 울면서 엄마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절규할 때는 가슴이 많이 아파서 나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그녀가 사라지고, 남자는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옆집 아이와 관련해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디어 한나.

 

남자가 그 편지에서 했던 말이 많이 생각이 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싶다라는 생각은 해도 할 수 없는 것들그것을 그녀와 자신이 행동으로 옮긴 것뿐이라고. 그러면서 자기가 왜 그 가게에 다시 간지 아냐고. “신이 아니라당신을 보러 갔어요.” 라고.

 

이 영화는 결국 사랑에 관한 영화였다. 상처에 대한 치유와 위로.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사랑에 관한 영화였다. 이 영화의 원제인 티라노사우르(Tyrannosaur)처럼 거대한 분노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중년 남녀의 사랑. 내게 이 영화가 특별하게 기억될 이유는 바로 이 사랑때문이다. 가슴이 많이 먹먹했지만, 결국은 사랑이 있어서 아름다운 영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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