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27 / 서강대 메리홀



솔직히 조금 많이 아쉽다.
그 이유는 내가 너무 기대를 많이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극 초반의 느낌이 너무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시작과 끝에 받은 느낌의 간극이 너무나 커 이 아쉬운 마음을 감추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솔직히 고전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이 있다.
모든 이야기들의 원형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금은 어렵고 난해하며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이유들이 나를 <갈매기>로 이끌었다. 

 

아마 첫 번째 이유는 10아시아에 나온 박해수 배우의 기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배우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데 <39계단>이라는 연극을 봤을 때 그 이름 석자를 기억하게 되었다.
뭐 등장한 배우가 4명 밖에 없었기에 외우기가 조금은 수월했지만. 
그 때 그 공연을 너무나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배우에 대한 믿음도 그냥 자연스럽게 UP!
하지만 역시나 무언가에 미친듯이 빠지지 못하는 나의 성격은 그저 그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면 반가워하는 정도이지 꼭 보는 수준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기사를 보고 나니 왠지 그의 연극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의 전작이었던 <됴화만발>의 경우에도 보고 싶다 여기고 못 봐서, 그런 아쉬움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희곡 <분장실>.
그곳에는 등장하는 여배우들이 안톤 체홉의 <갈매기> '니나'를 연기하는 장면이 나온.
왠지 <갈매기>를 봐야 좀더 <분장실>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렇게 <갈매기>는 내게 한번은 봐야만 하는 연극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이었다면 사실 그토록 기대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좀 웃긴 인과 관계이지만 <
오이디푸스>가 문제였다.
<
오이디푸스>에 심하게 빠져버려 "그래, 고전도 어렵거나 심오하지 않고 재미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해버린 것.
게다가 연출가도 한 몫을 했다.
사실 예전에는 공연 선택의 기준이 무조건 감이나 촉, 느낌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극장을 보게 되고 배우를 보게 되고 제작진을 보게 되고.
이번 <갈매기>의 경우, 연극 <레드>를 연출가였던 오경택 님이 연출했다는 게 나를 더 자극해버렸다.
연극 <레드>가 마음에 들었으니, <갈매기>도 좋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 이렇게 이야기 하니 공연이 엄청 안 좋았던 것 같은데, 사실 그건 아니다.
그저 나의 높은 기대에 충족되지 않았을 뿐.
내용에 관해서는 거의 정보 없이 갔는데,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리플렛을 읽어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그런 말들이 쓰여있었다. 

 

"연극 <갈매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

 

갈매기는 비극이다? 

갈매기는 코미디다!

 

갈매기는 어렵다?

갈매기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갈매기는 심각하다?

갈매기는 5개의 삼각관계에 얽힌 삼류 연애극이다!

 

갈매기는 115년 전 러시아 이야기다?

갈매기는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래, 이게 문제였다.
이것 때문에 ", 생각보다 웃기겠구나. 로맨스이구나." 생각했는데,
결국 <갈매기>는 비극이었으며, 사랑 이야기만큼이나 예술이란, 예술가란 질문을 던지는 어렵고도 심각한 연극이었다.

 

사실 도입부는 무척이나 신선했다.
아직 정시가 되기 전부터 배우들이 나와서 무대를 만든다.
연기를 한다.
객석으로 들어오는 관객들이 깜짝 놀라며 시계를 바라보던 장면을 훔쳐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었다.
공연 안내 멘트를 적절히 연결한 것도. 

 

1막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맞다
웃음 포인트가 많았다. 무대도 좋았고.
근데 약간 심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산만함.
배우들이 어느 정도는 연기로 커버를 해주기는 했으나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한 배우의 경우에는 웃기려고 그런 건지 어쩐 건지 모든 게 어색해 보이기도 했고.
그게 웃기기 위한 계산된 설정이었다면 왠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그리고 배우들의 라이브 연주와 춤에 대한 것도 리플렛에서 읽고 살짝 기대했는데,
처음에 색소폰 불 때는 솔직히 너무나 어우러지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라이브의 효과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래서 그 이야기와 춤과 음악의 상징성을 찾는 게 어려웠다. 

 

무대는 좋았다는 느낌과 조금 과했다는 느낌이 공존한다.
니나가 떠날 때의 무대 같은 경우에는 너무 멋있었는데(특히나 폭우가 쏟아지는 장면과 그 조명),
배우들 전원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도. 단순히 종이만으로 표현하는 무대도 좋았다.
하지만 의자와 술잔 등이 사용된 누대는 조금만 정리를 해줬다면 더더욱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도 그렇다.
물론 사랑이 이 연극의 핵심 소재이자 주제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뜨레플레프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랑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파멸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 충족되지 않은 예술에 대한 갈망이, 혼란이, 절망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닐까. 

 

이 연극에서는 마치 사랑과 예술이 동의어처럼 느껴진다.
그 질투가.
그 열망이.
그 욕망이.
그래서 나는 차라리 <레드> 처럼, <예술하는 습관>처럼
예술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좀더 초점을 맞췄더라면(이라고 쓰면서 든 생각은
이미 <갈매기>는 그 모든 것 다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사랑과 코미디'라는 홍보 포인트에 사로잡혀 좁은 눈으로 공연을 바라보고 아쉬웠다 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니나를 둘러싼 뜨리고린, 뜨레플레프의 삼각관계보다는 마샤의 외사랑이 참 아팠고,
엄마이자 여배우인 아르까지나와 아들인 뜨레플레프의 관계가 더 흥미로웠고,
마샤를 사랑하는 메드베젠꼬의 캐릭터가 참 좋았다.

 

연기는 대부분의 배우들이 모두 훌륭했던 것 같다.
특히 영화로만 뵈었던 이문수 님을 직접 연기에서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목소리 진짜 진짜 진짜 좋으신 거 같다.
, 나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목소리에 반응하다 보다.
그리고 엄마 아르까지나를 연기하신 우현주 님도 그 복합적인 캐릭터를 정말 잘 연기하신 거 같고(근데, 중간에 입고 나오신 그 블랙 수트는 좀 너무 큰 것 같다ㅠ ),
최근 TV에서 종종 봤던 뽈리나를 연기한 황영희 님. 정말 멋있으셨다.
정말 어색하지 않은 웃음을 유발하는 연기력.
도른을 맡은 김태훈 님도 마찬가지이고.
사실 이 커플의 이야기도 참 좋았었는데.


 

13명의 배역이 나오는 연극이다 보니 할 말도 많아진다.
멋진 무대를 봐서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 이상을 보지는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움도 많이 남았다.
앞에 박해수 님에 대해 미친 듯이 나열해 놓고, 막상 공연 후에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속상하기는 하다. 커튼콜 때 조금더 연기의 감정선을 갖고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어차피 연극이 끝나고 난 후이기에 꼭 필요하지는 않은 
너무 독단적인 나의 생각이며 이기심이지만,
커튼 콜에서 너무 빨리 뜨레플레프에서 벗어난 배우 박해수의 모습이 보여서
마지막 장면의 여운을 느낄 수가 없었다.

 

P.s 공연 관람 후 하루가 지나서, 희곡 <갈매기>를 읽어보았다.
물론 정독 및 완독은 하지 못했다.
무척이나 흥미로운 구절들이 많다.
아마 이번 계기를 통해,
나는 다시 어딘가에서 <갈매기>가 무대에 오른다면 또 그곳으로 향하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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