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18

고등학교 연극반 학생들의 공연을 봤다. 전국 청소년 연극제를 위한 지역 예선 참가작. <회장님, 어떤 며느리를 원하십니까>.

작년에 처음 공연이 되었다는데, 기성 극단에서 상연된 정극은 아니고, 고등학교 연극을 위해 쓰여진 작품이었다.

일단 각 정계의 회장님들이 맞춤형 며느리를 얻기 위해 비밀의 사립 학교에 며느리될 학생을 후원한다는 것, 그리고 선택된 아이들을 5세부터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차단한 채 회장님들이 원하는 직업까지 맞춰 사육(?)한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누나에게 어머니의 병에 대해 전하기 위해 남동생이 그 금남의 집에 여자로 위장해 들어가 그곳의 말도 안 되는 불합리를 깨우치게 해 그녀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 등. 소재는 굉장히 재미있었다.

물론 중후반에 "꿈"에 대한 부분 등은 너무 교훈적으로 설명하려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그대에게>처럼 위장한 성별이 들어가 무언가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순정만화 같으면서도 사회상을 비판하는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은 훌륭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의 아마추어 연극은 어설플 수밖에 없다. 대사도, 발성도, 발음도 불안하다. 가끔은 대사를 까먹기도 하고, 무대 위에서 두 팔과 두 손을 어찌해야할지 몰라 어색하게 서 있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연극이 아름다운 이유는 누군가에게는 평생에 유일하게 한 번밖에는 없는 경험과 기억과 추억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뒤바꿀마한 전환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대에서 내려오고 난 후에도,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십년이 지나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잊고 싶기도 했다. 그 기억이 아니라 그 관계를. 내가 내 현실이 너무나 버거워서 주위를 돌볼 여력이 없어서, 내가 스스로가 원하는 모습까지 다다르지 못해 부끄러워서 이제는 그만 인연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잠수도 타봤고 주위 사람들에게 투덜부려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난 그 자리다. 그 자리에 내가 있다.

아니, 내가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는 그 자리를 지켜볼 뿐이다. 과거를 기억하며. 그 때의 나를 기억하며. 그래서 그 친구들에게도 그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 친구들이 지금으로부터 10년이 지났을 때,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지금 그 순간은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그래서 난, 아마추어 학생 연극을 무시하지 않는다. 암전이 되었을 때 반짝반짝 빛나는 형광 테이프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어설픈 연극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배우에게는 어둠속에서 길을 인도해주고, 관객에게는 세상에사 가장 아름다운 밤하늘을 선사하는 연극을.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말썽을 부리는 학생이 많다는 이유로, 비난 받고 사라지는 일따위는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연극을 소중히 여겨주고, 그것을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그 열정에. 그 행복하고 아쉬운 순간을 지켜보고 박수를 보내줬으면 좋겠다.

"오늘의 너희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너무 수고했어. 아직 그 자리를 이어주어 고마워. 앞으로도 지켜줬으면 좋겠어. 그 곳을.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그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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