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일상이 바닥으로 시작해, 바닥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1인용 이불, 그 위에서 시작해 리모컨을 거쳐 이불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처럼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 해가 뜨기도 전에 지는 이런 상황은 뭔가"가 나의 일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근데, 최근 나의 일상은 그러했다.

누군가와 홍대행을 택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홍대를 질 알지 못한다. 서울 생활 8년차에 가장 아수운 점이 이태원과 홍대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때, 21살 그 무렵은 오히려 홍대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조금은 어려웠었다. 지유로운 영혼인 척 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이고 틀을 깨지 못하는 인간이니까. 그러다 몇 달전 다시 만난 홍대는 참 멋있었다. 참 즐거웠다. 공연도, 사람들도. 이제는 나도, 홍대도!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인가. 이 나이 먹어서. 후훗.

무튼 지인과 함께 한 홍대 나드리. 우선 만화책방에 갔다. 서점은 그리 많이 다녔어도 만화책을 주 도서로 판매하는 곳은 처음이었다. 역시나 나는 만화책을 잘 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린 시절 "만화책은 나쁜 것이다"라는 부모님의 주입은 거의 최면과도 같았다. 최면이 풀리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중학교에 가서야 만화책을 보게 되었으니까. 그 때 처음으로 만화책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습관이라는 게 무섭게 자리하고 난 후였다. "만화책을 빌려보는 건 왠지 돈이 아까워." 당시에도 부모님 몰래 봐야만 했으니까. 지금은 그런 내 습관이 너무 아쉽다. 이런 말, 하나 소용없지만 그때 만화책을 봤더라면 조금 더 상상력 가득한 내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억지이겠지?^^) 성인이 된 후에는 못된 다운로드로(완전 불법은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정당하지도 않은 방법!) 만화를 보곤했다. 역시 빌리지는 못하고. 그런 내가 만화책방이라니.

그 장소도 어색해죽겠구먼 지인이 하도 한 권 사보라고 종용하는 바람에, 생전 처음 내 돈 주고 만화책을 사 보았다.(아, 그 전날 이미 한 권 사기는 했구나. 한 권짜리.) 뭔가 한 권 사기는 사야할텐데 뭘 사야하나 고민하다 눈에 들어온 것. <몬스터>. 얼마전 KBS 연작드라마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면서 알게 된 만화였다. 그 드라마의 원 제목이 <몬스터>였던데다가 범인의 이름도 만화책과 같은 '요한'이었다. 일각에서 드라마의 원작이 만화책 <몬스터>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고, 두 작품의 상관관계를 묻는 이야기들도 많이 나왔다. 뭐, 결론은 만화책 <몬스터>가 광장히 훌륭하다는 것. 관심이 생겼고 결국 책방에서 1,2편이 담겨있는 특별판 1을 사게 된 것이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짓에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쇼핑도 좀 하고, 커피와 브레드도 좀 먹고, 아이디어 소품샵도 좀 구경하고. 시간이 훌쩍 훌쩍 지나갔다. 지난 번 홍대에 갔을 때 KT&G 상상마당에서 인디 음반들을 파는 곳을 인상깊게 보아, 그 곳으로 향했다. 요즘은 새로운 노래들을 찾아 듣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하.지.만. CD들로 가득했던 그 곳에서는 독립출판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사실 그곳에서 독립출판 전시회를 한다는 것도 알았고, 그래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그 장소가, 그 장소인지는 몰랐다. 음반 구경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그냥 독립 출판 전시회 감상으로 달래기로 했다.





독립 출판 전시회. 무엇에도 구에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인지 자유롭고 기발한 것들이 많았다. 물론 그렇게 기발하고 독튿한 것들은 대량 생산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때론 조금 기술적으로 어설픈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립 출판물이 갖고 있는 재기발랄함과 자유가 마음에 들었다. '독립'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 경쟁구조와 이익과계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야지만 가능한 이 세상 모든 것이 슬퍼지면서, 결국은 '독립'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가장 슬퍼졌다. 요즘 그림책이 좋아져서 그런지 아직 출판사와 계약하지 않은 빨간 색 그림책 한권이 너무 예쁘고 좋았고, 그 명함 크기에 언니들이 '나 한가해요'라고 말하면서 막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섹시 전단지(?)를 보여주고 옆페이지에는 그걸 그림으로 표현하고 멘트를 붙여놓은 책이 인상깊었다. 나도 나란 녀석을 참 모르겠고, 지금 생각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굉장히 우스운데...여성 운동을 하고 싶었었다. 그래서 아까 설명한 그 종이들을 모았던 적이 있다. 20살 무렵. 그 종이를 모은 후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불합리하고 잘못되었다는 뭔가 체계적인 논리에 의해 정립된 생각이 아니라, 그저 여자의 '성'이, '몸'이 상품의 수단이 되는 게 싫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걸 갖고 있으면 내 그런 생각의 증거가 되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나. 지금 돌이켜보면 옛날의 나는 지금보다 멋있던 것 같은데. 나는 어느 순간 모아놓은 그 종이를 버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 모든 생각과 의지를 놓아버렸을까. 나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무튼 그 책을 보며 옛날 내가 생각났다. 나는 생각은 있었으나 어찌해야 할 줄 몰라 버려버린 것을 이 사람은, 이렇게 멋있게 표현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사람의 연락처를 적어놓고, 물론 아직 연락을 하진 못했고 앞으로도 하지 못할 거지만, 과거 나를 떠올렸다. 나 역시 멋있게, 미치도록 재밌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그림책이 좋아졌다는 날( 이 모든 게 <겁쟁이 꼬마 생쥐 덜덜이>때문이다!) 지인은 '그림책상상'이라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으로 가는 골목길에는 곳곳에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출사를 나온 싸람들이 사진을 찍고. 그런 뒷골목 풍경이 재밌고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두둥. 휴무. 조금 아쉽긴 했지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진 않았다. 오늘로 만족하지 말고, 또 홍대로 놀러나오라는 무언의 약속을 받아내고 있는 것 같아서. 그 휴무라는 두 글자가. 예전엔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이제는 언제든 스스로 찾아올 수 있는 곳이 되었으니까.





맥주 한 캔으로, 거리 공연을 들으며 마무리된 홍대 나드리. 홍대 아이돌 <구제불능>의 공연을 보며 생각한다. 진짜, 진짜, 진짜! 재밌고 즐겁게 살거라고! 지루한 건 단 한 순간도 참을 수 없어. 무조건 재밌게 살거다. 일을 해도, 놀아도! 재밌게, 즐겁게. 그렇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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