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써놓은 게 다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젠장.
이렇게 되면, 사실 망설여지고 망설여져서 다시 쓰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며칠 나의 머리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드라마이기에.
드라마에서 나왔던 음악들이 귓가에서 맴돌고 있기에,
미친듯이 글이 쓰고 싶어졌기에,
다시 끄적끄적.

KBS에서 연작 시리즈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부활 김태원 아저씨를 다룬 '락락락'의 경우 꽤나 호평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기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특성상,
혹은 최근 드라마에 대한 전체적인 흥미가 떨어진 관계로 보지 않았었고.
그 다음 시리즈였던 '특별 수사대 MSS'는 손현주 아저씨라는 캐스팅으로 인해
보려고 시도하였으나,
조금 영화 <세븐데이즈>, 일드 <조커, 용서받지 못할 수사관>의 느낌이 살짜쿵 풍겨지면서
2회까지 보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 <화이트 크리스마스>.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제작발표회 기사 였다.
최장신 비주얼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포부였지 재밌었지만,
무엇보다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작가의 이름이었다.

박연선 작가.
개인적인 취향에 있어
영화 시나리오의 필모그래필로 본다면 조금 어정쩡한 작가님이시지만,
드라마 <얼렁뚱땅 흥신소>로 인해,
앞뒤 잴 것없이 최고인 작가님.

뭐, 많은 드라마 팬들은 박연선 작가님의 최고의 작품을 <연애시대>로 꼽겠지만,
내게는 <얼렁뚱땅 흥신소>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 박연선 작가가 그리는
스릴러 학원물은 어떤 느낌일까.

백성현이라는 배우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느낌이 있고,
(특히나 영화 <흐르는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에서 다시 한번 그의 성장을 느꼈다)
김영광도 남들은 잘 보지 않았던 시트콤 <볼수록 애교만점>에서 나름 괜찮은 이미지였고.
또한 김상경이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무한 신뢰가 있고.

그래, 어디 한번 기대해볼까.
라는 심정으로 감상한 결과.
이거는 기대 이상.

최근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이 암울하고도 우울한 분위기.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상위 1%의 학생이 다닌다는 수신고등학교에서
일년에 딱 8일 있는 방학을 맞아 학교가 빈 사이,
이상한 편지를 받고 남은 8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
조난 당한 의사(김상경)가 남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스릴러물이다.

너는 나를 비참하게 물들였고,
너는 나를 구석괴물로 만들었고,
너는 네가 아는 것을 침묵했어.
너는 내 가망없는 희망을 비웃었고,
너는 내가 가진 단 하나를 빼앗아 목에 걸었고,
너는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가 놓아버렸고
그리고 너는 눈 앞의 나를 지워버렸고
마지막으로 너는 나를 가로챘어.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8일간의 휴일이 지나고 느티나무 언덕길을 올라와 시계탑 앞에 서면 죽어있는 누군가가 보일꺼야.
아기 예수가 태어난 밤에 나는 너를 저주한다.

알 수 없는 편지를 받은 아이들은 불안해하며, 서로를 의심한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공포를 자아낸다.

한 겨울에 이렇게 공포가 어울릴 수 있다니.
쫀득 쫀득한 긴장감에, 영상에 비주얼도 훌륭했고, 음악 역시 너무나 좋았다.
학생 역할을 맡은 8명의 배우들은,
완벽한 연기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정말 키와 비주얼 때문인지 몰라도 충분히 매력있었다.
(영광 군의 캐릭터 변신이라던지, 윤수 역의 이수혁이라는 모델 출신 배우의 매력,
빨간 머리-정말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미르 역을 맡은 김현중이라는 배우의 비주얼 등도
정말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고등학생이 약에 취하는 장면이라던지,
자꾸만 리스크 컷(자해)을 긋는 캐릭터라던지
사회적인 금기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게 참으로 좋았다.

처음 1,2회는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굴까를 고민하게 되고,
3,4회는 공포가 그 아이들을 점점 악마로 만들게 되는 건 아닌가 가슴 졸이고.
(<배틀로열>처럼 서로 죽이고 죽게 되는 건 아닌가.) 
초반에는 모든 아이들이 다 의심스러운데,
이 드라마는 미스터리만으로 그렇게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는다.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 등장인물을 모두 의심스럽게 만들어 놓고,
막판에 가서 얼토당토 않은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고, 반전이네. 하는 거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더 좋은 것일수도.

4회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악마를 만나게 되는 순간은 자신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들키게 되었을 때라고.
사건의 중심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인물은 박무열(백성현).
(아놔. 얼렁뚱땅 흥신소의 무열이가 생각나네.) 
박무열은 학교가 인정한 모범생인 매뉴얼 맨.
하지만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천재인 최치훈을 이기지 못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혼란과 불안을 매듭지어 가고 있던 무열이,
결국 강모를 마녀사냥하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 되었음을 느꼈을 때.
좌절하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아파보였다.
뭐, 결론적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열이는 멋진 놈이었지만.

4부작인 줄 알았는데,
4회 마지막이 너무 엄하게 끝나서 깜짝 놀라고
다시 확인해보니 8부작이었다.

이제 범인도 밝혀졌겠다.
아이들은 그 범인에 어떻게 대항해나갈까.
괴물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야만 했던 8일간의 기록이라는
내레이션처럼,
아이들은 괴물이 되는 것일까.

우연이 충돌해 엄청난 불안과 공포를 만들어 냈다는 것,
그 이외에는
아직 풀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너무 궁금해서,
4부작으로 끝나고 마무리 지어지길 바랬는데.
또 앞으로 4주를 어떻게 매번 가슴 졸이며 있을까.

박연선 작가님, 너무 멋지시다.
이미 2007년인가에 인터뷰를 통해 소재를 내비치고,
지난해 초 16부작 대본을 완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드라마화를 하려 하지 않았다.
"대본은 매력적이나, 너무 모험적이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누군가 만든 걸 보고 싶다."
8부작으로 편성된 이 드라마의 대본이
나는 지금 절실하게 필요하다.

드라마가 한 회 한 회 끝날 때마다,
미칠 듯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 단어가 초라하고 초라해서.
내 이야기가 너무나 보잘 것 없어서.
어떻게 하면 저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 덧 1)

어느 기사에서 보길 박연선 작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취향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만 써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스럽다.
항상 새로운 피를 갈구하면서도 작가로 데뷔하고 나면 익숙한 것을 하라고 요구한다.
문제는 항상 경제논리다."

+ 덧 2)

4회에서 김요한(김상경)이 고열에 시달리며 읊조리던 대사들이,
꼭 얼렁뚱땅 흥신소에서 우리의 희경 씨가
미친 척하면서 읊조리던 대사와 느낌이 비슷하더라.
전혀 다른 대사임에도 불구하고.
얼렁뚱땅 흥신소,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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