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팔할의 힘은 언어 인가보다.
그 중에서도 입이라는 신체구조를 통해서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말.
나의 어린 시절은 부모님은 이렇게 회상한다.
신데렐라라는 어린이 동화책을 읽고 있으면,
'유리구두'라는 정확한 단어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지어내듯,
때.려.맞.추.는.아.이.

아버지라는 단어가 있으면
7살이 되어어서야 한글을 땠다던 오빠는
아버지를 라는 단어를 머리에 인식하고 정확하게 인지한 후, 입 밖으로 내었지만,
나는 글자의 모양만 보고,
아버지라는 단어겠거니 하며, 정답을 말해버리는 아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답은 맞았다고 한다.

내가 특별하거나 똑똑했다고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나를 부모님은 헛 똑똑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나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이유를,
나는 것넘는 (맞춤법이 맞는지 모르겠다) 아이였기 때문에,
학원에서 배우고 난 후에는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부모의 판단은 지금와 생각해보니 100% 확실했다.

7살까지도 한글을 떼지 못했던 오빠는
초등학교에 입학자하자마자 선생님으로 부터 집중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열심히 한다면 S대도 가능할 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때부터 부모님에 대한 오빠의 믿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착실하게 오빠는 모범생이 되었다.
공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빠를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것이,
(물론 엄마의 이야기로 인해 재조작된 기억일 수도 있으나)
오빠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다.
착하고 성실하고, 공부도 잘하는 오빠는 누가봐도 리더의 자질이 충분했다.
하지만 오빠는 단 한번도 반장 등 감투를 쓰지 않다.

13살, 아마도 오빠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인가보다.
어느날 오빠가 학교에서 돌아와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고 한다.
능력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왜 반장선거에서 기권을 해야 하느냐고.
그 당시 엄마 아빠는 대놓고는 아니었지만,
자식을 뒷받침해줄 능력이 안되는다고 은근히 이야기들을 흘렸던 것 같다.
자식이 학급 임원을 하면, 부모 역시 학부모 위원을 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정당한 이치 였으나,
부모님은 그걸 힘들어, 혹은 어려워 하셨고,
그건 고스란히 자식인 우리들한테도 느껴졌다.
그래서 항상 포기해야 하는 오빠가 그날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그 후 오빠가 임원을 했었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에 나지 않지만,
아마 초등학교 6학년 오빠는 처음이자 마지막 임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빠는 정말 충실히 학교-집-농구 동아리(축구 였던 것 같기도)만 왔다 갔다 하며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엄마는 오죽하면 그런 오빠의 학교 생활을 CCTV로 촬영하여 보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전교 1등.
하지만 오빠는 SKY대에 가지 못했다.
수능에서 3개를 틀리고도.
하긴 오빠가 수능을 볼 당시 60명이 넘는 만점자가 나왔으니까.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립대가 아니고서는 보낼 수 없다고 십 몇 년간을 말해오던
부모님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게 부모님의 마음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수를 해서 꼭 SKY에 가라고 말 할 수 있는 부모님도 아니었다.
오빠가 누구나 인정하는 대학교에 입학하길 바라는 부모님이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그것을 오빠에게 요구할 만큼 강압적인 부모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원하는 게 거의 없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학과의 학교에 들어갔다.
수석 4년 장학생으로,
그것도 문과의 시험을 보고, 이과의 학부에.
오빠가 나에게 이과만 공부했던 물리 교과서를 구해 달라고 했던 일이 선하다.

하지만 나는 오빠와 달랐다.
처음 부터.
오빠가 전교 1등을 할때, 나는 고작 반에서 2~3등.
하지만 오빠를 질투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믿는 사람은 오빠,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은 나.
우리에게는 분명한 역할이 있었으므로.

내가 대학 입시를 치룰 때쯤.
(나에게 SKY를 꿈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사립대에 두 명을 가르치는 게 힘이 든다며,
오빠에게 군 입대를 권했다.
우리 집 특색이 그러하듯 완전 강요는 아니었지만,
듣는 사람이 완전 싸가지가 아니라면 신경 쓰일 정도로.
오빠는 결국 군에 입대를 하고,
나는....재수를 했다.

나의 재수.
내게도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었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오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그정도 밖에 수준과 머리를 가졌다.
(재수를 했을 때, 과탐을 빼고, 내 성적은 1년 전 고3때와 그대로 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우리 부모님은 알지 못하고 있다.
재수 시절의 내 성적은 나 이외에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오빠는, 오빠는 재수르 했다면
아마 우리 나라에서 내노라 하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원래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재수를 한다고 했을때,
당연하지 라고 말해준 우리 오빠.
오빠에게 어느날은 화가 나서 물었다.
왜 재수를 하지 않은 거냐고.
오빠가 대답했다.
장남으로서의 무게.
눈물이 났던 것 같다.
내가 누린 평화와 자유가 꼭 오빠의 족쇄를 빌미 삼아 얻어 낸 것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울었던 것 같다.
그리고 미안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오빠가 자신이 마음만 먹었다면
금전적인 어려움 없이도 재수 공부를 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빠라면 재수 학원 내에서의 장학생도 무리 없이 해 냈을 테니까.
그래서 오빠가 집의 사정 때문에 재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
오빠 역시 지금의 공부에 만족을 하고 있으니까.
오빠에게 지금도, 재수를 하지 않은 게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오빠는 그 말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우리 오빠.

솔직히 이런 말을 지껄이려고 시작을 한 건 아니었었는데.
요 며칠 일본 드라마에 빠져 살고 있다.
그러다 오늘 친구들을 만나 맥주 한 잔을 했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 봤던 일본 드라마에 대해,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너무 많아,
핸드폰에 계속 메모를 했다.

나는 말이 좋은 가보다.
프리젠테이션, 임기응변, 사회.
다 자신 있다.
나에게 주어진 재능.
하지만 중요한 건 그걸 받아주고,
들어줄 사람이겠지.

이런 말을 하려다,
엉뚱하게 오빠에 대한 이야기로 빠져버린 것은
아마도 오늘 설렁 설렁 봤던
<나의 여동생>이라는 일본 드라마 때문인가보다.

'지껄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틀거리기  (0) 2010.10.05
옆길로 새기  (0) 2010.10.04
이렇게 또 시작  (0) 2010.09.01
오밤중에 또 흔들리는 마음  (0) 2010.07.22
그냥 근황  (0) 2010.07.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