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깨지고 망가지는 것들

 

어제, 유리컵 하나를 깼다.

얼마전에도 유리컵 하나가 뜨거운 물에 쩍-하니 갈라져버렸는데

사은품으로 받은 거라 그리 섭섭하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유리컵은 책상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질 만큼 속이 상했다.

몇 년 전 아는 동생에게 선물 받은 이 유리컵에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문장이 적혀져 있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 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어제,  1TB 외장하드 하나가 사망했다.

40여 편의 한국, 외국 드라마가 들어있고

셀 수도 없는 수십편의 영화가 들어있는 외장하드였다.

외장하드 자체도 워낙 오래 된 데다가

내용이 사진이나 중요 문서가 아니라

복구를 맡기는 것도 애매모호했다.

 

하룻밤을 갖은 방법을 쓰다가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고작 드라마, 영화인데

먹통이 되어버린 외장하드 처럼 마음이 답답해졌다.

 

나에게는 

깨져버린 그 잔에 맥주를 따라 마시며,

망가져버린 외장 하드 속에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꺼내 보는 것이

일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드라마와 영화는 다시 구하면 되고,

맥주도 다른 잔에 따라 마시면 될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허전함이 왠지 오래 갈 것만 같다.

 

 

2. 이상한 수집병

 

어디서부터 시작이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아, 생각 났다.

인터넷으로 휴대폰을 샀더니 파일공유 사이트의 다운로드 상품권이 따라왔다.

아주 오래전에 가입한 사이트였는데, 오래간만에 일본 드라마 등을 좀 받아 볼까 한 게 시작이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드라마나 영화 등을 구해 소장하는 건 나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가급적 불법 다운로드는 안 하려고 하는데, 100% 결백해지는 것은 참 어렵다)

 

그러다 보니 1TB 하나로 시작한 외장하드는 이미 5개가 되어 버렸다.

위에 언급한 망가진 1TB 외장하드 1개와 2TB 2개, 500GB 1개, 예전 노트북에서 빼놓은 232GB짜리 1개.

게다가 2대의 노트북까지.

 

정리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 깔끔한 성격도 아니면서

왠지 모르게 정리가 하고 싶었다.

어느 외장하드에 어떤 파일이 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해서

보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이것저것 연결해야 하는 게 싫었다.

그렇게 정리를 하기 시작하자 다른 일은 시작할 수 없어.

엑셀 파일에다 리스트업까지. 하하하하.

 

이렇게 정리를 하다 보니, 보지도 않은 영화와 드라마가 너무 많다.

한국 드라마의 경우, 보고 좋았던 것들만 소장하고 있지만

해외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에는 안 본 것들이 훨씬더 많다.

보지도 않을 거면서 왜 나는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책도 그렇다. 

눈 앞에 알라딘 중고 서점만 보이면 시간이 없지 않는 이상

들어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그리고는 꼭 한 두권씩 들고 와야 직성이 풀린다.

 

보지도 않을 영화와 책들을 수집하고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3. 오랜만에 다시 본 <케이조쿠 2 스펙> 드라마&극장판

 

그렇게 이틀동안 꼬박 외장하드를 정리하다

케이조쿠 2 스펙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10편의 시리즈 드라마와 2편의 TV 특별판, 3편의 극장판까지.

꼬박 15편을 본 것.

물론 집중을 하면서 드라마만 본 건아니고

외장하드를 정리하면서 틀어놓은 수준이었지만.

 

스펙 기(10편의 드라마) : 기

스펙 상 : 승 (TV 특별판)

스펙 천 : 천 (극장판)

스펙 령 : 제로 (TV 특별판)

스펙 점 : 결 上 (극장판)

스펙 효 : 결 下 (극장판)

 

내가 마지막에 극찬을 했던 기억이 가물 가물 나는데....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내가 왜 이 드라마를 좋아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물론 시작은 카세 료였겠지만)

 

게다가 마지막으로 가면 갈수록,

더더욱 이 드라마를 왜 좋아했을까 의구심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효의 편' 마지막 삽입곡이 나올 때,

뮤직 비디오 같은 그 장면들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 음악 한곡이 끝날 때까지 돋은 닭살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마지막 그 장면을 위해 달려왔구나.

그 장면 때문에 내 기억 속에 이 작품이 이토록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었구나.

 

하나의 인상적인 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마 막연히 좋았었던 기억은 사라질 테지만,

그 마지막 장면만큼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

이래서 드라마를 다시 보는 게 좋다.

처음과 다른 기분을 느낄 수도 있지만

볼때마다 좋은 장면을 만날 수도 있고

볼수록 더 좋아지는 장면을 만날 수도 있고

새롭게 좋아하게 되는 장면을 만나게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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