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22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15살인지 16살이었는지 명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차범석의 <산불>은 본 게. 그저 차범석이라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꽤나 야했었다는 느낌만이 뇌리에 박혀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산불>의 포스터를 보게 됐다. <산불>을 모티브로해 만들었던 뮤지컬 <댄싱 섀도우> 때문에도(이 뮤지컬을 보지는 못했다) 꼭 다시 한번 이 연극을 보고 깊었는데. 이번 캐스팅이 진정 죽음인 것이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배우, 장영남 언니. 꽤나 좋아했던 배우이나 최근 애정이 조금 식어버린 조민기 님. 관심은 크지 않으나 어쨌든 유명한 배우, 강부자 선생님까지.

정말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티켓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다. 가난한 워킹푸어족인 내게, VIP 7만원, R 5만원, S 3만원은 후덜덜한 금액이고, 그렇다고 1만원의 A석을 보기에는 뭔가.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사실 <산불>보다 더 보고 싶은 연극도 있고해서 살그머니 포기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이 공연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시는 거다. 문화생활과는 담을 쌓고 사는 엄마가, 애써 보여준 <친정 엄마와 2박 3일>도 재미없다고 한 엄마가 이 연극에 관심을 보이다니! (물론 아는 배우가 나와서 겠지만.) 내가 보고 싶어한 걸 엄마도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꼭 보고 나서 엄마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돈이 없으면 A석이라도 놓치지 말자 하며 예매 사이트를 들어갔더니 헌혈증이 있으면 40% 할인! R석과 S석을 놓고 고민하다 좌석이 나쁘지 않길래 S석으로 결정, 물론 돈도 없고! 예매를 하려고 보니 이번주 일요일(6/26)이 막공이었다. 주말에는 갈 수가 없고 평일에 가자니 사실 요즘 회사 업무상 무리가 있는데, 그냥 저질러 버렸다. 맘은 좀 불편하지만, 그래도 즐거울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었다.

서두가 길었지만 그렇게 보게 된 <산불>. 헌혈증 뭉치가 이렇게 고마울때가. 헌혈증 한 장을 내고 티켓을 받았다. 최근 헌혈을 꽤나 오랫동안 못 했는데, 조만간 한 번 피 뽑으러 다녀와야겠다. (여전히 서두가 길다^^;;;)

OP석 한 쪽에는 피아노와 마이크가 준비되어있었다. 피아노 연주와 라이브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꽤나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했고, 기대를 많이 했는데. 이런. 음이 너무 높아 부르시는 분이 힘들어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암전시 음악이 서서히 커지고, 줄어드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두 없고, 연기할 때 잔잔히 깔리는 맛도 있어야하는데 그것도 없고. 무대 전환을 할 때, 시선을 돌리기는 좋지만 너무 피아노와 가수에 집중되어 오히려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었다. 라이브로 갈 꺼면 차라리 보이지 않게 숨어서 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우선 무대는 정말 훌륭했다. 대나무 숲, 초가집 두 채, 그 집으로 내려오는 길, 대나무 숲으로 가는 길. 어디 하나 디테일하지 않은 곳이 없다. 집으로 내려오는 길은 언덕처럼 되어 있어 배우들이 무지하게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약간 들었다. 중간에 남자가 숨어있는 곳으로 바뀌었을 때도 동굴을 너무 잘 표현해놓은 것 같다. 방 안에서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도 방 안에 조명을 켜자 불투명했던 황토벽이 투명하게 변한 것도 참!!! 좋았는데! 다만 기둥 때문에 시야가 방해됐다는 게 좀... S석을 무시하는 건지 뭔지. 근데 그 크고 멋지고 디테일한 무대장치와 달리 가장 많이, 대부분에서 활용된 곳이 앞마당일 뿐이라는 게 조금, 아주 조금 아쉬웠다. 떨어지는 눈 등, 투자도 많이 하고 신경 썼다는 느낌은 충만했지만!

연기는 누구하나 모나게 튀거나 못하는 사람 없이 잘 어우러진 것 같다. 그렇다고 미친듯이 잘 하는 사람도....^^;;; 강부자 선생님은 연극무대에서는 처음 뵈었는데 '역시나'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물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장영남 언니나 조민기 님은 배역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의 영남 언니는, 멋있다. 조민기 님은 캐릭터 때문에.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는 어려서 잘 몰랐는데 조민기 님이 맡은 '선상님(규복)'의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줏대 없이 휩쓸려 산으로 올라가고 거기서 도망나와 여자 하나 잡아서 사랑이 어쩌구 저쩌구 느끼한 멘트를 날려대며 살아남기를 선택하더니 나중에 점례와 사월에게 자신을 이용하고 사육했을 뿐 아니냐며 그녀들을 비난하더니 자신의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기만'하고 개죽음을 당한다. 물론 규복도 시대의 비극이라면 비극이겠지만 중심인물로는 느껴지지 않고 그저 주변 인물로만 느껴진다.


반면 여성의 욕망이라는 부분에서 접근한다면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연극임은 확실한 것 같다. 누가 누구를 비난하며, 또 누가 누구를 욕할 수 있단 말인지. 옳고 그름의 개념없이, 그녀들을 바라봤다. 사월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성적인 부분이 아니라 왜 엄마에게 '모성'이 필수인 것일까. '모성'이 없다고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 고립된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다만 그녀의 죽음으로 끝이 난 게 아쉽기는 했지만. 사실 어렸을 때 봤던 이 연극의 결말이 기억이 나지 않았었다. 나는 사월이 불이라도 지르는 게 아닐까 했었는데. 아무것도 결론이 나지 않은 게 아쉬웠다. 어떤 갈등도 회복되지 않았다. 이념의 대립도, 사랑도, 며느리의 부정을 알아챈 채 불타는 산불을 바라보고 있는 양 씨. 그냥 모든 것이 현재 진행형처럼 느껴졌다. 막이 내리고 난 후의 그들의 삶은 변함없이 '불행'일 것이다.

시대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연극이란 칭호를 받는데 무리가 있을 것 같다. 특수한 시대상은 끈임없이 우리에게 이야기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으니. 오히려 시대에 상관없는 인간의 본능과 세상사를 말하고 있기에 <산불>이 훌륭한 연극인 거 아닐까. (물론 시대가 더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주기는 하지만) 왜냐하면 이 연극을 보면서 난 지금을 살고 있는 무수히 많은 점례와 사월, 양 씨 등 그 등장인물들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여전히 남과 북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줄을 긋고 그 줄을 사이에 두고 싸우고 있으며, 그 싸움 안에 소시민들은 피해를 입고, 그 피해를 입은 와중에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굉장히 보고 싶은 연극이었지만, 연극을 보는 내내 설레고 좋지만은 않았다. 우선 조금은 재미가 없었다. (여기서의 재미는 웃음 포인트를 말한다.) 군데 군데 시도때도 없이 '아가야'와 '밥줘'를 외치는 노망난 할아버지와 난리가 난 탓에 정신줄을 놓아버린 바보 귀덕(?) 덕에, 그리고 사월을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럽게 연기한 영남 언니 덕에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초반은 확실이 조금은 지루했던 것 같다. 내가 너무 소극장의 웃음 가득한 가벼운 연극에 길들여진 게 아닐까 하다가 어쩌면 너무 많이 반복되고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드'하다는 느낌이랄까. 내 옆에 중년 부부가 앉아 "젊은 애들도 생각보다 많이 왔네."라고 말했다. 그러고 둘러보니 고등학생부터 중년층까지 정말 다양한 연령층이 와 있었다. 과연 고등학생들이 이 연극을 재밌다고 생각했을까. 중년 부부가 또 말했다. "볼만은 한데 조금 심심하긴 하네. 뮤지컬보다 더 재미가 없는 거 같아." 일행인 뒤에 앉은 중년 부부가 말했다. "좀 자버렸네."

좋은 내용인 것은 누구나 안다. 그리고 세상 연극이 모두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이 좀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는 조금더 재미를 부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정형화된 웃음 말고. 정말 관객이 웃을 수 있는 웃음. 그러다 감동이 빡 하고 터져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테니. 그리고 거의 주인공이었던 점례 역의 서은경(?) 님. 연기가 나쁘거나 그런 건 아닌데, 입 모양이 꽤나 신경이 쓰였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입 모양. 아,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나.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봐서 기분 좋은 연극.
무대가 멋져서 좋았던 연극.
하지만 이렇게 좋았던 연극을 어떻게 하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좀더 오래(공연기간) 상연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 연극.
그런 연극, <산불>.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