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29 / 남산예술센터

 

 

 

공연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면 (특히 뮤지컬 마니아들) 동일한 공연을 몇 번씩 반복해서 관람하는 경우가 많다. 무대라는 게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라이브이기 때문에 캐스팅에 따라, 혹은 그날 배우의 컨디션, 객석 분위기에 따라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나는 마니아까지는 아닌 것인지, 단지 돈이 없어서인지 똑 같은 공연을 반복해서 보느니 다른 공연을 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이 세상에 봐야만 하는 공연이 얼마나 많은데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공연들이 있다. 작년 5월 경에 본 <푸르른 날에>도 그런 공연 중 하나였다. 올해 무대에 다시 오른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한번 다시 보고 싶었던 연극. 만원의 행복을 기회로 예매를 하고 남산예술센터로 향했다.

 

사실 이렇게 한번 봤던 공연을 다시 볼 때에는 걱정 혹은 두려움이 앞선다. 처음의 그 감동을 다시 느끼지 못하게 될까봐. 그런데… <푸르른 날에>는 그런 우려가 무색하게 역..나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스토리텔링이며, 내가 좋아하는 연출이며, 내가 좋아하는 연기다. 아무리 인상 깊게 본 공연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게 한계가 있어서, ‘, 이런 장면이 있었구나.’ ‘이런 대사가 있었어?’ 하는 부분들이 있다. 처음 본 것마냥 새롭게 느껴지는 장면과 대사도 있고, 한번 봤기에 흐름을 따라가기 쉬워 처음과 다르게 더 의미가 있게 다가오는 부분들도 있었다. 예전에는 별로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좋게 느껴지기도 하고, 지난번에 그저 지나쳐 갔던 부분이 더 인상 깊게 남기도 했다. 감동하고 느끼는 포인트도 그때 그때 달라지고.

 

처음 <푸르른 날에>를 봤던 작년에는연극 보기를 이 공연으로 다시 시작했었다. 공연 보는 것 자체를 한참을 잊고 살았었는데이 공연을 통해 다시 연극을 보기 시작했고, 그저 내가 객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 만으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용도 좋았지만 연극적인 재미에 푹 빠졌었다고나 할까. 지난번 공연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우리나라의 굴곡진 역사와 그로 인한 한 개인의 인생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좀더 푸르른 날에라는 시 자체에 몰입을 했던 것 같다. 사실, 얼마 전 <불후의 명곡2> 송창식 편을 보다가 임태경이 부르는 푸르른 날에를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작년에 이 공연을 볼 때에는 푸르른 날에가 서정주 시인의 시인 줄도 몰랐고, 송창식의 노래인 줄은 더더욱 몰랐다. 오늘 공연을 보니 심지어 그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불구하고, 그때는 몰랐었다. 불후의 명곡에서 그렇게 이 노래를 드는데 가사가 너무 아름다운 것이다.

 

푸르른 날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아름다운 가사를 보고 들으며, 이 연극이 더욱 생각이 났고, 오늘 보니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건 결국 이 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아픈 역사와 개인사를 들춰내 의식을 고취하고 인생을 말하고자 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결국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하는 그 한마디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사실 아까도 말했다시피 공연을 보기 전 걱정이 됐었다. 처음 이 연극을 봤을 때에는 참 많이 웃고, 참 많이 울었다. 그런데 이번에 안 웃기고 안 슬플까봐. 정말 다행이었던 게 우선 자리 자체가 지난 번과 완전 반대였다. 지난 번에는 C구역이었는데, 이번에는 A구역. 의도한 게 아니었는데 지난 번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어서 일단 기분 좋은 스타트라고 생각했다. 정각이 되기 전 무대에 나와서 절을 하는 여산, 바느질을 하는 정혜, 그리고 객석 사이를 어슬렁 어슬렁거리는 여산의 벗. 특히나 객석을 왔다리 갔다리 하는 여산의 친구는 솔직히 지난 번에도 그렇게 시작했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나서…. 또 한번 다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연극을 보기 시작했다.

 

역시나 연극을 도와줄 아이라고 하면서 소품 등을 갖다 주고 치우는 배우를 소개하는 장면은 다시 봐도 좋다. 연극과 실제의 경계를 허무는. 리얼리티 넘치는 연극도 좋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지금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연극이 좋아졌다. 특히나 <푸르른 날에>인생=연극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다. 여산과 정혜의 기억 속의 일들이 엉키며 환상과 과거가 마구 교차하는 부분도 좋고, 신파 가득한 이야기를 신파조로 연기하는 부분도 다시 봐도 유쾌하고 웃기다.

 

대부분의 캐스팅이 작년과 같았는데, 주인공인 민호(여산의 젊은 날)의 형, 진호 역할에 뉴 페이스가 등장했다. 작년에는 박윤희 배우님이었는데(연기 참 잘하셨었다), 이번에는 바로 바로 바로 바로 바로 바로 바로 바로 정승길 배우님. 첫눈에 반했던 여자가 동생(민호)의 연인임을 알고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던 민호의 이복 형. 동생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정혜에게서 뒤 돌아서 서서 출가를 하고 나자 그 여인과 아이를 책임져야 했던 형, 진호.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진호는 박윤희 님과 정승길 배우님의 더블 캐스팅이다. 오늘 공연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다시 한번 박윤희 배우님의 연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정승길 배우님의 등장과 함께 나는 마음 속으로 환호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이름을 외우는 연극배우가 그리 많지는 않은데, 정승길 배우님은 이제 확실히 얼굴과 이름이 매칭이 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내 심장을 쏴라>, <돍날> 등에서 봤던 정승길 배우님을 예상치 못하게 다시 뵙게 돼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한창 공연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살짝 저 형 진짜 웃기지 않니?” 하는 말이 들려왔는데, 왜 내가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지. 하하하.

 

옆에 홀로 이 공연을 보러 온 여성 분은 공연이 시작하자 마자 눈물 바다. 나는 공연 중반부부터 주르륵 주르륵 주르륵 주르륵. 이미 한 번 봤던 공연이라 웃음은 작년보다 덜 한 것 같은데, 눈물은 작년보다 더 한 것 같다. 알고 있어서 덜 슬플 줄 알았는데, 알아도 슬프다. 다음에 어떤 장면이 나오고, 어떻게 전개될 지 알고 있으니까 더 먼저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죽는 것이 두려워 살아남기를 선택한 민호. 그래서 자신이 지키지 못한,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죽은 이들의 환영에 휩싸여 미쳐버려야만 했던 민호.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에도 사과드립니다라는 말만 반복한 채 출가하는 길을 선택해야 했던 민호. 그래서 민호라는 이름을 버리고 여산이 되어야만 했던 민호. 다시 봐도 슬프다. 지난 번 자리와는 달라서 뚝뚝 떨어지는 그의 눈물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참 아팠다.

 

스님이 된 여산은 모든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추악했던 자신의 과거를 떨쳐버리려고 하지만 딸이자 조카인 운화의 청첩장을 받아 들고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린다. 결국 이 연극은 큰 스님의 말씀처럼 잊지 못할 것을 억지로 잊으려 하지 말고 보고 싶고 그립다면 그냥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라고 말한다. 여산이 결국 결혼식장에서 운화의 손을 잡고 입장하며, 정혜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장면. 사실 작년에 공연을 봤을 때는 이 장면은 그리 인상 깊지 않았었다. 그저 모든 등장인물이 무대에 나와 행복한 듯 춤추며 노래할 때 먼 곳을 응시하며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산의 모습만이 여운으로 남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알을 남의 둥지에 낳아놓고 남모르는 듯 하는 뻐꾸기의 이야기나 결혼식 장에서 정혜와 마주쳐서 한참 뒤에야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여산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혜가 만들어 준 두루마기를 벗어서 다시 정혜가 전혜주고 스님의 복장으로 돌아가는 여산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 연극을 보고, 처음에 난 역사의 아픔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본 오늘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간만에 실컷 울 수 있어서 좋았고, 좋은 공연은 언제 다시 봐도 좋다는 느낌을 받아서 좋았고, 좋아하는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어서 좋았고, 내년에 다시 보고 싶은 공연이 생겨서 좋았던, 그런 연극이었다.

* 연극 <푸르른 날에> (2011) 감상평 바로 가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