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 : 2011. 05. 29
공연장 : 남산예술센터


얼마전부터,
아니, 꽤 오래전부터 연극이 꽤나 보고 싶었었다.
너무 나를 잃어가고 있는 거 같아서.
연극이 처방전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따위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찾게 되었다.
숨 쉬고 싶어서.
숨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지지난 주 공연 하나를 예매했는데
회사 일 때문에 취소도 못하고 표 자체를 날려버렸다.
그러고 나니 다시 멈춰버릴 것만 같아서,
보고 싶은 연극 리스트를 작성했던 것을 펼쳐보았다.

나의 공연 선택 기준!
우선 오픈런 공연은 제외.
할인은 필수!
(아무래도 여전히 가난한 워킹 푸어족이므로...)
두 개의 기준을 충족시키면서도
위시리스트에 있던 공연이 <푸르른 날에>였다.
(날짜 상연 때문에 <디 오써>도 함께 후보에 올랐으나 할인 받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포기!
카드 할인을 받은 <푸르른 날에>로 결정되었다, 는 쓸데없는 비하인드 스토리)

<푸르른 날에>.
제3회 차범석 희곡상 수상작이란 것도 맘에 들고,
남산예술센터 작품들도 다 좋았었고,
고선웅 연출님도 조금 관심이 가는 분이고.

사전에 알고 있던 정보는,
광주 5.18을 배경으로 한 '신파' 가득한, 웃은과 눈물이 적절히 배합된 연극이라는 것.
뭐 대충의 줄거리는 광주민주항쟁 때 고문에 못 이겨 양심을 버린 남자가
속세를 떠나 스님이 되어 살다가
그 당시 시대의 비극으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여자와 자신의 아이의 결혼식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숨기고 싶었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는 것.

사실 그런 마음으로 보러 갔다.
신파면 어떠하리.
통속을 통해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거 아냐?
그리고 도대체 이 신파를 어떻게 웃음과 적절히 배합했다는 거야~? 하는 궁금증?

오랜만에 보는 연극이라 가슴이 살랑살랑하다,
막상 객석에 앉으니 울컥울컥.
이유 없이 좋아하게 된 그 한 가지.
하지만 더더욱 좋아하지 못해 멈춰 서버린 한 가지.
그러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좋을 그 한 가지.

그 한 가지 속에 들어와 있다 생각하자 마음이... 아리아리해졌다.

연극은 생각보다 굉장히 재밌었다.
특히나 '신파'!
나는 사람들이 하도 신파, 신파 하길래 정말 스토리가 신파인 줄 알았는데, 이거 웬걸.
배우들의 연기 등 의도적인 '연출'의 신파.
너무 재밌었다.
아플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는 현실을 웃음과 적절히 버무리기 위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꼭 웃음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연극에서 말하는 것 처럼 "이것은 인생이다....이것은 인생이다"라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한 방법이 될테니까.

요즘은 이런 연극에 매력을 느낀다.
(연극도 어지간히 안 보면서 '요즘' '이런' '매력'이란 단어 따위를 쓰는 게 스스로에게 굉장히 우슺긴 하지만)
꼭 사실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지금 당신들이 보는 건 연극이오.'라고 친절히 알려주는 그런 연극들.
연극적 재미를 극대화해주며 무대와 무대밖의 경계를 허물어주는.

예를 들면 소품등을 정리해주는 배우가 이야기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부르면 나온다.
처음 부터 연극을 도와주는 '아이'라 소개되고, 찻상을 나르거나 소주병을 가져오거나
기타를 가져온 후 옆에서 서서히 리듬을 타고 결국 아무말 없이 춤까지 추다가 들어가는 등.

<푸르른 날에>는
이러한 연극(무대)에서만 가능한 연출로 재미를 극대화하고
더불어 중후반으로 갔을 때는 감정을 극대화 하는 역할을 해준다.

과장된 몸짓과 연기, 연출로 재미를 주다가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사실감 넘치는 연출과 연기를 선보이는 것이다.
그 사실감 넘치는 끔찍한 장면을 마주했을 때,
관객은 더 극적인 감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물고문 장면이 그러했다.
시종일관 심각해지지 않으려 투쟁마저도 그 시대의 팝 음악의 경쾌함으로 포장했던 이야기는
(물론 그 팝송 이전의 시 낭송 -김남주 시인의 학살2-은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강렬하고도 직설적이었으며
거의 웅변에 가까웠지만 그 바로 다음 팝송을 BGM으로 투쟁결의라니.
심지어 한 배우가 곡 소개도 해준다.
결의를 다지는 구호를 외치다가 지금 흐르는 곡은...이라면서.)
고문 장면에서는 완전 진짜 처럼.
아니, 진짜로.
고문관이 실제 물구덩이에 배우의 머리를 쳐 넣는데...
정말 객석에는 침묵만이 감돌고,
나는 결국 시선을 떼고야 말았다.
절말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이건 극중 민호가 죽는 게 아니라 배우가 죽을 것만 같아서,
실제로도 저렇게 괴로웠겠지.
동생과 제자를 팔아 목숨을 구걸하는 그가 비겁자나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정말 그 순간만큼은 그러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침과 물이 뒤섞여 배우의 입과 코에서 훌러내린다.
눈물이 난다.
그 뒤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 이상의 삶을 겪게 된 주인공.
배우로서 매력적인 배역이 아니었을까 싶다.
연기도 정말 잘 해주었고.
배신한 동료의 환영에 시달리며 떠돌이 생활을 하다 한 스님을 만나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에게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만되풀이 한 채 출가한 주인공.
그 때 그 민호와 정혜의 눈물이란.
그리고 그런 동생의 사람을 사랑했던,
그래서 동생의 아이를 제 자식으로 거둬드린 민호의 배다른 형 진호의 모습까지.
그 이별의 장면에서 정말 남녀 배우가 뚝뚝 눈물을 흘리는데...가슴이 많이 아팠다.
민호는 승려 여산이 되어서도 그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지 못하다
조카이자 실제 딸인 운화의 결혼식을 계기로 조금은 벗어나고 위로 받는다.

딸의 결혼식장.
과거와 현재에 등장했던 모든 사람이 나와서 즐겁게 사진을 찍으며 행복한 모습을 보이고,
승려 여산은 미고 짓다 울며 웃으며 막을 내린다.

그 마지막 모습이 어찌나 찡 하던지.
한 사람의 개인사와 아픔이 그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기에.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아픔의 무게가 조금은 이해가 갔기에,
그 미소가, 그 눈물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연극을 보는 내내,
살아남은 자는 모두 유죄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유난히 굴곡의 역사가 많은 우리 나라. 잊어서는 안 되는 그 뼈 아픈 순간들.

내용도 좋았지만 배우들이 정말 연기를 잘했다.
큰 스님으로 나오시는 분, 이영석 배우님. 
대사는 몇 마디 없어도 진심 카리스마 넘치셨음.
형으로 나왔던 박윤희 님, 캐릭터와 디테일이 살아 넘치셨음.
등등등.
배우들의 전체적인 앙상블도 좋고.

무대 및 실제 타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좋았으며,
(참 비루한 감상평이, '좋다'라는 것 외에는 다른 표현 방법이 없구나)
조명이나 음악도 마음에 들었다.
사실, 조금 조명이 과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기준이 죽는 때라던지.)
전체가 좋으니,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오래 간만에 너무 좋은 연극을 봐서,
기분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은,
그런 하루였다.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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