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남짓, 이 동네를 왔다 갔다 했으면서도. 그 중 6개월 남짓한 시간, 일주일에 5일, 하루 2번씩 그곳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오늘에서야 처음 그곳에 발을 디뎠다. 브로드웨이 시네마. 처음엔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서, 괜시리 시설이 낙후할 거라는 추측 때문에 그곳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 중 한 관을 인디플러스에 내준 후, 그곳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하지만 이전의 습관들 때문이었을까. 이상하게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오늘, 스스로에게 어떤 예고도 없이 그곳의 문을 열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딱히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퇴근 후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고는 매일 타던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탈까 생각해 영화관 앞 정류장을 서성였던 것뿐.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런 내가 나도 모르게 어느새 영화관에 들어서 있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일 영화를 보자고 했던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가벼운 약속이 결국 지켜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마지막으로 회사에서 같이 나온 동료가 금요일인데 그냥 집으로 가냐는 아무 것도 아닌 질문을 던졌기 때문일까.

매표소는 브로드웨이 시네마와 인디플러스로 나뉘어져 있었다. 직원이 자리를 비워 텅 빈 인디플러스 쪽으로 다가가 시간표를 봤다. 당장 볼 수 있는 마지막 영화는 <모차르트 타운>이었다. (아! <뽕똘>이 보고 싶어서 들어간 거구나. 그게 이제야 생각이 나다니;;;;)

<모차르트 타운>

어디선가 얼핏 본 제목이었다. 하지만 봤다는 사실만 기억날 뿐, 어디서 봤는지 무얼 봤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옆에 비치된 리플렛을 꺼내 들었다. 우선 깜짝 놀란 건 외국 영화가 아니라 한국 영화였다. (또 얼핏 생각났다. 이 영화는 <나넬 모차르트>와 함께 소개되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당연히 외국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리플렛에 적혀 있는 문구가 내 눈길을 끌었다. 아니, 내 마음을 찔렀다.

-도시 속 외로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다
-모차르트가 남긴 아름다운 유산, 외로운 사람들의 소나타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외로움과 슬픔을 피해 어디로 갈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 난 외로웠다.
그래서 영화관의 문을 연 것이다.
그것이 이유 없다 여긴 갑작스런 영화관 방문의 가장 큰 이유였다.

영화는 생각만큼 잔잔했다. 그리고 덤덤했다. 그 덤덤함이 미칠 것만 같았다. 영화는 교환교수로 한국을 방문해 모차르트를 가르칠 한 외국 여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한 그녀. 하지만 그녀를 스쳐 지나간 이 나라에,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희망도, 설렘도 없었다. 외로움만 가득했을 뿐.

아니, 사랑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의 사랑도 명확하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저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받기 위한 어떠한 순간에, 어떤 사건에, 어떤 행동에, 어떤 사람에 기대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었을까.

<도교 소나타>가 많이 생각났다. 영화에 흐르는 소나타 선율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잔잔하고 담담한, 하지만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불안하고 또 불안한 삶의 연속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한 평 남짓한 노점 가게에서 3년 째 연락 두절인 남편을 기다리며, 아니 원망하며, 아니 미워하며, 아니 사랑하며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던 한 여자. 그리고 당뇨에 걸린 고속버스를 운전하는 반찬투정이 심한 아버지 때문에 문을 닫은 일터에서 중국의 취직 자리를 알선해 줬을 때도 떠날 수 없었던 피아노 조율사. 그는 그녀를 사랑했나? 아니면 그녀와 자고 싶었을 뿐인가. 사랑이라 믿고 싶은 건, 그녀에게 섹스를 거부당하고 난 다음 날에도 그녀에게 다가와 건넨 일상의 대화와 그 환한 미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만남은 채팅이라는 가상의 공간이었을 뿐이지만, 그 공간에서 여자의 답이 없자 “제가 뭘 실수했나요?”라고 묻던 그 소심한 남자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걸 외로움 때문만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를 미치게 만들던 건 이 남자가 아니었다.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나쁜 남자 콤플렉스가 있는 것일까. 일수를 찍고 술집을 경영하고, 작은 방에 혼자 사는 또 다른 남자. 말이 좋아 사장이지, 그냥 건달. 세미 조폭. 새벽에 퇴근하는 그가 새벽에 출근하는 그녀에게 산 담배 한 갑. 남들은 오후인 그의 아침. 그는 팬티만 입은 채 담배 한 대를 태우며 창가에서 그녀의 가게를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녀의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는 취객을 저지하면서 그와 그녀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녀와 데이트도 하고, 결국 불발로 끝났지만 모텔에 간 것은 피아노 조율사인데,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달 아저씨와 그녀가 더 애틋한 것일까.

잔잔한 걸 좋아한다 해도, 나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에 민감한 여자이기 때문인지 여자의 카메라가 떨어지며 세 남녀가 마주칠 때는, 관객이 4명 밖에 안 되던 영화관에서 나 혼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 하고. 피아노 조율사는 여자를 위해 그 카메라를 고치려 전자 상가를 헤매고, 건달 아저씨는 돈을 받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피투성이로 만든 채무자의 손 옆에 있던 카메라를 들고 와 그녀에게 전해준다. 어떤 감정의 표현도 없이. “부담 없이 받아요” “괜찮아요” “그냥 받아요” “괜찮은데” “그냥 써요.” 그 무심한 대화들이 정말 날 미치게 만들었다. 분명 그들의 감정과 마음에는 변화가 있었을 텐데. 그 대화에서는 사소한 설렘도, 떨림도, 미소 조차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게 그냥 나는 그렇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아니 서글펐다. 아니, 모르겠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비단 이 세 명이 아니었다. 처음 그 교환 교수가 서 있을 때, 같은 프레임 안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하고 있던 흑인 남자. 불법 체류자. 단속반이 뜨면 도망가기에 급급하고, 도망에서 돌아온 후에는 사장으로부터 오래 자리를 비웠다고 욕을 먹는다. 목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신에게 기도해도, 목사는 무력하게 사장으로부터 욕을 먹고 쫓겨날 뿐 그 어떤 것도 해주지 못한다. 신은 없다. 장기조차 팔 수 없는 그.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충격적인 결말이, 예상치 못한 그 상황이 견디기가 힘들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는 것일까. 죽은 사람을 향해 거침없이 발길질을 하는 그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그 곁에 떨어진 사진 한 장은 날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떠난다. 교환 교수인 그녀가 이 도시를 만나게 해준 모차르트에게 thanks to를 외치며 떠난다. 3년 간 남편을 기다리던, 외로움에 지쳐가던, 하지만 남편과의 마지막 사진 한 장을 버리지 못했던 노점 가게, 그녀가 떠난다. 남편의 전화 한 통을 받고. 남편이 왜 떠났는지, 그녀는 남편과의 통화 이후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 설명해주지 않은 채, 그저 그녀가 떠난다. 외국인 노동자인 그와 그녀가 떠난다. 사장에게 농락당하고 아이의 사진을 품고 있던 그녀가 흑인 남자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세 여자가 나란히 공항 에스컬레이터에 서 있다.

누군가는 thanks to를 읊조리며 떠난 곳이 누군가에는 악몽 같은 곳이었고, 또 누군가에는 외로움에 사무치는 곳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삶이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자가 있다. 건달 아저씨와 함께 술집을 하는, 마담 급 여자. 형사에게 몸을 대줘야 하고, 건달 아저씨를 좋아하지만 그조차도 표현할 수 없었던. 그래서 남자가 자신을 품지 않은 채 홀로 그의 욕구를 해소할 때, 그 앞에서 벌거벗은 채 절망해야 했던 한 여자. 그리고 노점상 가게 여인이 남자에게 전해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곳을 떠나겠다고 말한 그 여자.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냥 공항을 떠나는 그들의 모습과 ‘땡스 투. 모차르트’라는 내레이션일 줄 알았다. 근데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술집 여자였다. 건달 아저씨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도 담담했던 그녀. (이 영화가 무서운 게 이 점이었다. 모든 게 너무 담담해. 그래서 더 힘들었던 것 같기도) 그랬던 그녀가 술에 잔뜩 취해 먹은 걸 게워내고, 손님들이 있는 홀에서 소변을 본다. 주위 여자들은 미쳤냐고 말하지만 손님 중 한 사람이 그걸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것도 미소 띤 얼굴로.

소변을 보는 장면은 더럽지 않았다. 그 소변 마저 나한테는 눈물로 보였다. 그녀가 안고 있는 설움을, 슬픔을 그렇게 밖에는 배출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슬펐다. 헌데, 그녀를 바라보는 손님의 시선에서 불편해졌다. 결국은 불편한 영화였다고. 절망적인 영화였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 하나도 편해지지 않았다. 물론 에필로그에서 웃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긴 했지만 어쨌든 서글펐다. 너무 담담해서 진실 같고, 사실 같고, 현실 같아서. 그저, 이건 영화잖아, 라고 말할 수만은 없어서. 많이 먹먹해졌다.

영화는 노점 가게에 걸려 있는 사진을 클로즈업 하면서 시작한다. 그래서 사진은 계속 영화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곳곳에 거울을 배치해 그 곳에 인물이 비치게 한다. 그러면 그 거울 역시 하나의 사진이 된다. 사진이라는 프레임이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을 가득 채운다. 뭔가 굳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그 느낌이 참 좋았다. 그냥 ‘삶’이라는 게 그렇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전규환 감독. 내가 이 감독의 이름을 외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그 사람의 3부작 <애니멀 타운>과 <댄스 타운>이 보고 싶어졌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난 날은 뭐랄까. 행복한 기분은 아니지만 오랜 여운을 갖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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