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야 할 것이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옛날에 보내고 받았던 메일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과제로 제출했던 <파니핑크> 감상문을 발견했다.
23살에 봤던 <파니핑크>.
그 때도, 그리고 28살인 지금도, 내 마음에 깊게 기억되고 있는 <파니핑크>.
그 때 이야기 했던 6년에서 5년이 지나버려, 29살까지 1년 밖에 남지 않은,
지금 이 글을 다시 꺼내어 읽어본다.
나는, 참 변한 것 없이
여전히 사랑이 두렵고 어렵구나.

오르페오를 찾습니다

- <파니핑크 (Nobody Loves Me, 1994)>를 보고-



Prologue

나에게는 해골모양의 귀걸이 한 쌍이 있다. 지하철 역 조그마한 좌판에 놓여 있는 해골모양의 귀걸이가 눈에 들어왔고, 그 후 내가 좋아하는 액세서리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특이한 걸 좋아할 뿐이다. 나는 밤에 자기 전 항상 일기를 쓴다. 일기의 마지막은 자기 최면과 같은 말들로 끝맺음을 한다. 주문과도 같은 나를 버티게 해주는 말, 때론 힘든 내게 위안이 되며, 용기가 되는 그 말은 다름 아닌 “넌 류**이잖아.”이다.

내 나이 23살. 나는 아직까지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노처녀가 될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저주의 말로 여겨질 ‘너는 노처녀가 될 지도 모르겠어.’라는 말이 23살의 내게는 욕도 아니며, 낯선 말도 아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친구들은 서로에게 아름다운 사랑이 찾아오기를 바란다며 건배를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유독 ‘너의 프로페셔널한 삶을 위하여!’라는 말을 건네곤 한다. 가장 심한 경우에는 ‘**야, 정말 너는 결혼을 안 하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겠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그러나 나 역시 그 말에 화를 내는 대신 동감을 한다.

그러나 나는 독신주의는 아니다. 사랑이 온다면, 나 역시 사랑을 하고 싶다. 그러나 오지 않는 사랑을 억지로 기다리며 안절부절 하고 싶지는 않다. 사랑 말고도 난 하고 싶은 게 아직 너무나 많다.

그런 내가 <파니 핑크>를 보게 됐다.

S# “나는 강하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사랑하고 사랑 받는다.”


나와 그녀는 같다. 그러나 나와 그녀는 너무나 다르다. 파니 핑크. 그녀는 말한다. “너무 친밀한 것에 겁을 내기 시작하죠.”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나 자신도 날 사랑하는 건 힘든 것 같아요” 그러나 나는 나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쳐있다.

그녀는 항상 자기 최면을 걸며 자신의 마음을 컨트롤 한다. “나는 강하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는다.” 하지만 언제나 마지막 말을 내뱉는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눈물이 가득하다. 나 역시 항상 자기 최면으로 스스로를 다독이곤 한다. 그러나 나의 말은 “넌 류**이잖아.” 나는 ‘류**’이라는 고유명사를 하나의 정신적인 의미로 바라본다. ‘나는 류**이기 때문에 약해지면 안 된다. 류**은 원래 강하니까. 원래부터 사랑하며, 사랑받는 사람이니까.’라고 말이다.

그녀는 29살. 사랑을 해봤지만, 아직도 사랑이 무섭고 걱정스럽다. 나는 23살. 사랑을 해본 적이 없지만 사랑이 무섭고 겁이 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너무나도 하고 싶으며,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싶다. 나는 사랑이 하고 싶기는 하지만 간절하지는 않으며 사랑이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면서 때론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고, 또 때론 이해할 수 없었다. 파니가 바라는 것은 어쩌면 누구나가 바라는 아주 작은 소망일지도 모른다. "날씨가 너무 좋아." "열쇠, 잊지마." 같은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파니 핑크." "내 인생엔 네가 필요해."라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말이다. 솔직히 그게 아주 큰 욕심은 아니며, 나 역시 그런 사람을 간절히 원한 적이 있었다. 지난해 여름방학 너무너무 사랑이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파니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극도의 우울함이 기숙사 방 천장에서 돌고 있는 선풍기 프로펠라의 모터 소리마저도 핸드폰 진동소리로 느끼게 했던 그런 시간들에 말이다. 누군가에게 “날씨가 너무 좋아”라는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아니 내가 먼저 할 수라도 있기를 원해서 핸드폰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누를 수 있는 번호가 없었다. 그때의 심정을 생각하면, 파니가 점성술사 오르페오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르페오 말 한마디에 관리인 슈티커의 차를 박고 그에게 했던 행동들은 솔직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 아닌 다른 방법으로 그 우울하고 암울하고 쓸쓸했던 두 달간의 나날들을 극복해,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된 나로써 남자에게 목을 매는 그녀의 행동이 바보 같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지다 못해, 사랑에 대해서도 달관하게 된 나는 이제와 그녀만큼 쓸쓸해 봤으면서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뻔뻔스럽게 말을 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다. 남성과의 이성적인 사랑은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인 내가 29살의 파니 핑크를 보고 있는 심정은, 솔직히 한심이라고 말해도 과함이 없었다. 나보다 예쁘고, 나보다 훨씬 날씬하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있는 나에 비해 튼튼한 직장과 안정된 집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사랑 하나가 부족하다고 징징대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녀는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그 한 가지가 더 간절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아직 사랑 외에도 하고 싶고, 원하고 간절한 게 더 많으니까. 사랑이 두 번째, 세 번째가 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친구가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 지겨워 ‘뭔가 새로운 일이 필요해.’라고 중얼거리는 내게 ‘이제 우리한테 새로운 일은 사랑뿐이야’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남은 것은 사랑 하나뿐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파니도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짧은 생각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남성으로부터의 사랑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살아가는 이유를 느낀다면, 그 인생은 정말 그녀가 좋아했던 생명 없는 해골과 같은 삶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에 우울하고 절망스러우며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그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미리 죽음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 뿐. 그러나 그녀의 마음가짐으로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생명을 잃어 생기를 잃어버린 도피처일 뿐이었다. 이성간의 사랑 하나로 그녀는 불만을 갖고, 즐거움을 잃었으며 죽음을 꿈꾼다. 사랑에 아파하는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랑으로 아픈 자신의 마음을 정 주체할 수 없다면 세상의 힘든 사람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스스로가 사랑 하나로 아파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삶의 힘겨움으로, 삶의 버거움으로 아파하고 있다고 말이다. 내가 파니와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 말을 그녀에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대중가요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산다는 것 그것조차 그대에게 힘이 들었다는 걸. 사랑이 그대에게 사치라고 느껴졌나요.’ 누군가에게는 사랑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수 있다는 것. 인생에 있어 필수불가결인 행복의 조건이 되어야할 사랑조차도 사치가 될 만큼 힘든 사람이 있다는 거. 오르페오처럼. 그 사실을 파니가 알기를 바랬다.

내 바람대로 파니도 결국은 나와 같은 심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오르페오로부터 말이다. 오르페오. 자신을 사랑하는 게 서툴고, 그래서 남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아야만 살 것 같았던 파니는 오르페오로부터 조금씩 변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오르페오의 엉터리 같았던 주문으로 바람둥이 관리인을 만나고 아이러니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을 때, 오르페오는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집도 잃었다. 오르페오를 돌봐주며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달라져가기 시작했다. 친구의 아이와 오르페오와 함께 온몸에 그림을 그리고, 미친듯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도 압권이었으며, 변신을 위해 오르페오의 꾸밈을 받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수줍음이 많다던 그녀가 오르페오 앞에서 만큼은 모든 부끄러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조금씩 특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니가 좋아.’ 오르페오의 그 한마디가 나의 마음을 너무나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당시, 관리인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파니에게 그 말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말에 불과했겠지만, 그런 말들이 파니를 조금씩 바꿔놓은 것이다.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이성이 아닌 인간의 진정성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말이다. 그는 말한다. “반이 찼어, 비었어? 없는 것이나 불가능한 것, 잃을 것에 대한 불평, 항상 부족해하는 마음.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잖아?”라고 말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를 보살피며, 자신을 조금씩 조금씩 사랑하게 된다. 사랑을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그녀는 서서히 깨닫게 된다. 언제나 사랑할 사람이 나타나기만 할 뿐 사랑할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던 그녀는 점점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오르페오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 그녀는 무조건적이고 자발적인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녀와 나는 같았다. 그리고 달랐다. 처음에는 나이는 어렸지만 내가 그녀보다 우위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는 나 자신을 사랑했고, 쓸쓸함과 고독, 외로움을 스스로 극복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쓸쓸함과 고독, 외로움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 그녀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만심을 가졌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녀보다 아래에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오르페오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나를 너무나 사랑해, 스스로에게 방패막이를 치고 있다. 난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순간 마음의 어긋남이 ‘상처’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만 같아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두렵다. 아니, 더욱 솔직히 말하면, 찾아오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는 것이 지쳐서, 이미 벌써 나와 상관이 없는 일처럼 치부해버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랑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오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며 쩔쩔매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서, 언젠가 사랑이 찾아온다면 좋겠지만,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23살의 나는 나를 다독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겁쟁이. 누구보다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다짐하지만, 결국 둘이었다가 혼자가 되었을 때, 그걸 견딜 자신이 없어 처음부터 혼자가 되려는 그런 겁쟁이. 내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스스로가 상처받는 게 겁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겁쟁이인가보다. 어쩌면 바보 같아 보였지만, 사랑을 갈구할 줄 알았던 그녀가 나보다는 더욱 용감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결국 사랑도,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도, 주위의 소외된 사람까지도 끌어안을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S# ‘아니야,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주인공이 파니보다도 오르페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사기꾼 같아 보이는 그가, 너무나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확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좋다. 흑인이었고, 돈도 없었고, 번듯한 직장 대신 점성술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고, 병이 있었으며 동성연애자이다. 그는 사회에서 말하는 소수자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가 한 번도 초라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아니다. 딱 두 번 그가 너무나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가 게이바에서 노래를 부를 때 그가 사랑하던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입맞춤을 할 때. 그 당황스러운 너무나 슬퍼보이던 눈동자, 그리고 강을 바라보며 다리 위에 있는 사랑하던 사람을 잃은 자의 초라한 어깨, 그리고 옥상에 올라갔을 때, 고통 가득한 눈과 차마 떨어지지 않는 눈물을 봤을 때, 그때 그가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그를 통해 동성애자의 사랑도 이성애자의 사랑과 하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솔직히 퀴어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 영화에 깔려있는 동성애 코드가 아주 낯설거나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내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스스로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야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존재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성적 소수자들을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솔직한 심정으로 난 머리로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을 뿐 마음 속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재작년 케이블 TV를 통해 <퀴어 에즈 포크>라는 외국드라마를 본 후 나의 마음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실처럼 그들을 바라보지 않은 곱지 않은 시선부터 시작해 아들의 동성애를 이해하는 어머니의 등장도 파격적이었고,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까지, 동성애자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 안에서 ‘정상’이라 불리는 이들에 의해 소외당하는 그들의 ‘정상’과 다를 바 없는 ‘사랑’이 내게 진심으로 다가 왔다. <파니핑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그에 대해 배타심을 느끼기 보다는 삶의 힘겨움 앞에 사랑을 놓쳐버린 한 남자를 보았을 뿐이었다.

이렇게 오르페오에게 이미 푹 빠져버린 나에게 거의 광분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했던 장면은 다름 아닌 그가 점을 봐주는 조그마한 좌판을 차렸을 때였다. ‘미래를 봐드립니다. 손금도 봄’이라고 스스로의 살길을 찾던 그에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가 흑인 이었으니까. 그에게 미래를 물으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 사회에서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아프리카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썼을 때, 그에게 돈을 던져주며 험한 말을 하는 백인. 나는 용납할 수 없는 그 광경을 보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흑인이라는 것이 백인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사실인가. 과연,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그에게 그런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인가. 세상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의 그런 오만과 자만에 의한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세상을 점점 병들어 가게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병들어갔던 것처럼. 그에게 동전 몇 개와 함께 몇 억 원어치의 상처를 덤으로 안겨준 그 아주머니, 그리고 아파서 갈 곳이 없는 그를 내몰았던 관리원. 그들을 보면서 나는 미칠듯한 가슴 아픔을 느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그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보다 더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 누구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파니핑크 이전에는.

파니도 아마 그에게서 그가 안고 있는 진심어린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파니, 스스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를 그가 가진 조건이 아닌 마음으로 좋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 역시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 그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 그가 무일푼이라는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를 위해 알마니 양복을 다리던, 그리고 휴지를 들고 화장실에서 기다리던 파니와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파니처럼, 그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처럼 파니를 아낄 수 있다면,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그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마음과 마음을 맞닿을 수 있게 하느냐가 중요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레인보우 아이즈』라는 젠더 문학집에 의하면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은 여섯 가지 색깔이라고 한다. ‘길버트 베이커’에 의해 디자인된 이 깃발의 각 색깔은 저마다의 상징이 있다. 빨강은 ‘삶’, 주황은 ‘치유’, 노랑은 ‘태양’, 초록은 ‘자연’, 파랑은 ‘예술’, 보라는 ‘영혼’. 일반적인 무지개 빛깔의 하나인 남색도 원래 디자인에 포함되어 ‘조화(調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일단 제작과정에는 좌우 조합을 위해 빠졌다고 한다. 동성연애자, 그리고 무일푼에 흑인이라는 빨강색을 가지고 있었던 오르페오는 주황색 빛으로 파니의 마음을 치유해주고, 그 과정에서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도 치유한다. 노란색 ‘태양’아래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초록색 빛을 내뿜고 있는 그의 육체는 비행기 소음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의 보라색 ‘영혼’은 언제나 그녀와 그리고 나와 함께 있을 것 만 같았다.

S# '서른 넘은 여자는 남자 만나기가 원자폭탄 맞는 것보다 어렵다‘



이 영화는 ‘서른 넘은 여자는 남자 만나기가 원자폭탄 맞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속담으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 많은 노처녀에 대한 인식은 세계 어느 곳이나 비슷한 가보다. 영국 <브리짓존스의 일기>나 한국에서 유행했던 <내 이름은 김삼순> 등 최근 노처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 추석 등 명절이 되면 집에 내려가는 것이 두려움이 되어 버리는 노처녀들은 주위사람과 집안 어르신들로부터 끊임없는 취조를 당해야한다. 혼기에 찬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무슨 죄라도 되는 냥 말이다. 그런데 ‘혼기’라는 것 자체가 관념적으로 사회가 만들어 놓은 평균적인 적령기 일뿐이지 그 것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인지 모르겠다.

특히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던가. 이 영화에서 나오는 파니 핑크의 어머니 역시 파니에게 말을 한다. “네 신체 시계는 디지털인가보다. 똑딱 소리 안 들리니? 파니, 네가 뒤처지는 건 싫어.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모르지, 늙는 게 뭔지 넌 아직 몰라. 유일한 위로는 젊고 싱싱한 남자의 몸뿐”이라고 말이다. 왜 결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뒤처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지, 그 사고를 이해할 수 없다. 아니,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사고라고 여기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S#‘스스로 결정하는 죽음’

얼마 전 죽어있는 새를 봤다. 길을 걸으며, 아스팔트 위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한때는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녔을 새의 모습. 그 뒤로 며칠 동안 그 죽은 새가 잊혀지지 않았다. 죽은 새. 새가 죽었다. 나는 그 죽은 새를 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녀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의 차에 떨어져 있는 죽어있는 새. 그녀는 그 새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두려운 것, 그녀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죽는다는 것! 아니, 그녀는 혼자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두려운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니핑크>를 보면 끊임없이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온다. 처음 해골 귀걸이부터 시작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죽음’이라는 모임까지. 그녀는 직접 관을 만들고 비석을 만든다. 그리고 ‘파니핑크 : 눈이 있는 동물을 먹지 않는다’라는 묘비명을 직접 쓴다.

내가 볼땐 죽음을 생각하는 그녀와 관리인이 겁쟁이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삶이 무료하고 따분하고, 우울하다고 해서 죽음을 꿈꾸는 사람들. 그 죽음이 또 다른 시작이라고 믿는 것.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특히 나 역시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오르페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조금은 변화된 시각을 갖게 되었다.

죽음이 특별할 것은 없다. 죽음도 삶의 일부분처럼 우리의 곁에 언제나 공존하고 있다. 해골분장을 했던 오르페오를 보면서, 그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그가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마 어떠한 것에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보여지는 해골 귀걸이, 해골 장식구, 해골 반지, 해골분장 등 그들의 삶 속에는 죽음이 아무렇지 않게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삶의 고통, 힘듦을 피해 도망갈수 있는 도피처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마 파니도 결국은 나처럼 깨닫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Epilogue.

23살의 나는, 사랑을 꿈꾼다.
23살의 나는, 삶을 꿈꾼다.
앞으로 6년 후,
나는 꿈꾸던 사랑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렵지도, 조급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성을 향한 사랑은 내가 품고 있는 사랑의 일부분일 뿐이니까.
내게는 파니 핑크가 변화했듯이 인간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나 함께 하고 있을 테니까.
혹시 때때로 삶의 힘듦이, 아니면 지독한 외로움이 나를 감싸고 올 때면,
내 곁에는 오르페오가 함께 할 테니까.
때에 따라 언젠가는 가족이라는 오르페오가,
친구라는 오르페오가,
아직 만나지 못한 나의 오르페오가 말이다.

오르페오가 보고 싶다.
오르페오가 보고 싶다.
오르페오가 보고 싶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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