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에서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하나씩 보고 있다. 왓챠에서 왕가위 감독 특별전을 하는데... 말로만 들었던 어렴풋이만 알고 있었던 그의 명작들을 하나씩 도장 깨기 하고 싶었다. 명장면도 많이 보고, 패러디도 많이 보고, 오마주도 많이 봐서 마치 내가 이미 본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영화들. 하지만 솔직히 제대로 본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처음으로 선택된 작품은 <해피 투게더 리마스터링>(1997). <옷상‘s 러브> 때문에 약간 퀴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그나마 홍콩 배우 중 아는 사람이 장국영이니까. (장국영을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그가 나온 작품을 단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냥, 그가 나의 어린 시절에 유명했으니까. 그리고 그의 죽음이 너무 거짓말 같은 사건으로 회자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연예인과 이미지가 닮은 사람이었으니까)

밤에 일부러 불을 끄고 핸드폰을 옆으로 치워 둔 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1997년 영화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었다. 나는 솔직히 왕가위 감독이 왜 유명한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영상미, 미장셴이 정말 훌륭하더라는 거. 그 영화가 홍콩이 아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배경으로 하는 지도 몰랐다. 영화 속에서 제대로 마주한 장국영은 정말로 섹시하더라는 거. 이미 그의 인생과 그 끝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영화를 보면서 좀 황당하게도 다음 웹툰 <밤의 베란다>가 생각나기도 했다. 사랑하는 상대의 곁에 있기 위해 상대가 다치고 아프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미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하는 사랑의 끝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나름 두 사람의 감정에 몰두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었다. 물론, 그 시작점과 두 사람의 달달한 연애를 볼 수는 없기에 상대에게 집착하게 되는 ‘왜’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결말도 완벽하게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그냥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해서 갈갈이 찢겨 졌던 한 남자의 이별 극복기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뭐 그럴 수도. 일단 전체적으로 굉장히 좋았다. 영화의 분위기하며, 연기하며, 감정선이라던지... 진짜 지금 현재 만들어진 영화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일단 왕가위 감독 영화에 대한 스타트는 굉장히 좋았던 것으로. 두 번째로 선택된 영화는 <아비정전>(1990)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오래된 순서부터 볼까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냥 익숙했던 것부터 봐야 할 것 같았다. 장국영을 좀더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맘보 춤을 추던 장면은 정말 수도 없이 봤던 것 같다. 과연 그 장면이 왜, 어디서에, 어떤 이유로 나오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아비정전>. 여전히 장국영은 섹시하더라. 사람이 저렇게 섹시할 수 있구나 싶었고, 경찰관이 너무 잘 생겨서 누구지 하고 찾아보니 유덕화더라. 내가 이렇게 홍콩 영화에 무지하다. 유덕화의 젊은 시절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장만옥은 (생각해보니 장만옥도 이름과 얼굴은 너무 잘 아는데, 그녀의 영화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왜 예쁜지 모르겠지만 참 예쁘더라. 사실 처음에 장국영이 장만옥을 꼬시는 장면(?)은 어렸을 때 봤더라면 멋있었을 거 같은데 지금 내 나이에는 손발이 너무 오그라 들기는 했다. 배우들이 마음에 드니 그 정도는 넘어가는 것을.

왕가위 감독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해피투게더>와 <아비정전>만 봤을 때는 사랑 후 이야기(감정)를 참 잘 다루는 거 같다. 항상 사랑의 시작이 아닌 끝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왜 여자들이 장국영한테 목숨을 걸고 빠져 드는 지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물론, 장국영이라고 생각하고 본다면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극 중 캐릭터 상으로는 도대체 왜 저 남자한테 집착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수밖에) 좀 황당하지만 <아비정전>은 보면서 한국 영화 <사랑을 놓치다>(2006) 생각이 많이 났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비슷한 게 없는데, 그냥 계속 생각이 나더라는 거. 특히 장만옥과 유덕화가 함께 있는 장면에서.

소소하게 영화를 보며 생각한 거. 영상미는 확실히 좋구나. 시계를 작정하고 참 많이 보여 주는구나. 시간과 순간에 대한 고찰(?) 좋으네. 장국영의 맘보춤 장면은 왜 그리 유명해진 건지... 잘 모르겠다. 댄스 장면을 감독이 좋아하나? <해피투게더>의 탱고 장면도 그렇고. 장국영과 양 엄마의 관계성은 잘 따라가지 못하겠다. 친엄마로부터 버림받은 사실이 아비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알겠는데. 이 영화에서도 홍콩뿐 아니라 필리핀을 배경으로 하네. 필리핀에서 장국영과 유덕화가 만나는 스토리 라인 및 구성은 좋았는데, 갑분 액션씬? 엔딩 기차 씬 좋기는 좋은데.... 조금은 이해가 안 가기도. 올해 영화를 보고 ‘해석’을 검색해 본 게 <아메리칸 사이코> 다음으로 두 번째인 거 같다. 장국영이 연기한 ‘아비’라는 인물이 이해가 되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부족한 건가? 식견이 짧은 것을 어찌하랴.

 


그다음으로 보고 싶은 건 <화양연화>였지만, 오래된 순서대로 보자 싶어 <열혈남아>를 선택했다. 사실 <아비정전>에서 장만옥과 유덕화가 너무 잘 어울렸던 이유도 있다. 그렇게 선택한 <열혈남아>(1987). 왕가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데... 사실 가장 보기 힘들었다. 워낙 남자들의 세계를 다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탓이 컸다. 그런 류의 영화를 보지 않는 나에게 도대체 의리가 뭣이 중한데. 유덕화의 의형제인 창파 캐릭터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고... 30분이라도 영웅이 되고 싶다고? 그런 동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멋있나? 뭐, 홍콩 느와르? 그런 영화가 유행하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왜 남자 관객들이 열광하며 이 영화를 수십 번씩 봤는지, 유덕화와 장만옥의 비주얼을 생각하면 왜 여자 관객들도 이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는 가지만 개인적으로는.... 흠흠흠.

물론 이 영화 속에서도 중간중간 영상미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이 있다. 홍콩 뒷골목 양아치들 이야기하면서 장면이 이렇게 예쁠 수 있구나 하는 장면들. 특히나 란타우 섬에서의 버스들이 나올 때 참 좋더라. 음악도 참 좋고. 물론 이 영화뿐 아니라 <아비정전>이나 <해피투게더>도 음악이 참 마음에 들었다. 

<열혈남아> 대만판은 엔딩이 다르다기에 한번 찾아보았다. 감정적으로나 러브스토리적으로는 대만판이 더 울림이 크겠지만, 이건 처음부터 사랑 이야기보다는 남자들의 세계에 관한 영화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나한테는 좀 힘든 영화였지만, 뭐 나름의 가치는 있지 않을까 싶다. 1973년 <비열한 거리>라는 영화를 모티브로 삼았다는데... 무튼 전설의 시작을 마주한 것으로 이 영화감상의 의미를 삼고 싶다. 

이렇게 3편의 영화 감상이 끝났다. 웃긴 게 왓챠에서 <해피투게더> 예상 평점이 3.7이고, <아비정전>이 3.5고, <열혈남아>가 3.2였는데... 너무 정확하게 그 순서대로라서 놀라웠다. 이제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 <화양연화>(2000)를 볼 생각이다. 나무 위키에 나온 왕가위 감독에 대한 정보를 살짝 훑어보았는데 “탐미주의 감독들이 잘 듣는 비판이지만, "너무 미장센에만 힘을 쏟아부어 정작 스토리는 빈약하다"든가, "영화를 찍으려고 연출력을 발휘하는게 아니라 연출력 자랑하려고 영화를 찍는 느낌"이라든가, "미장센 빼고는 남는게 뭐냐?" 등의 지적을 자주 듣는다.”라는 문장에서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그의 영화를 더 보고 난 후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그의 영화를 마주하는 것이 재미있고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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