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래간만에 끄적인다.
특별히 무언가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이 공간을 또 이렇게 방치해놓고 말았다.
이 공간이 방치 되어 있는 순간은...
왠지 모르게 내 삶도, 내 시간도, 내 인생도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참 웃기지.
이 공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게 '고작' 한 편의 드라마라니.
이렇게 다시 이 감정들을 글로 끄적이고 나면, 내 인생도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
뭐, 결과를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내게...
드라마는 '고작'이 아니다.

오늘 <청담동 살아요>가 170회의 막을 내렸다.
솔직히 말하면, 170회를 한편도 빠지지 않고 보지는 못했다.
청살을 시작한 것 자체가 한 111, 112회 정도였으니까.
그 뒤로 1회부터 시작해 이제 107회 정도를 정주행 하였고,
실시간으로는 매일 본방 사수는 하지 못하고 띠엄 띠엄 챙겨보았다.

좋아하는 드라마라면, 응당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보아야 하며
최소 2-3번은 반복해서 봐야 내 인생의 드라마라는 말이 나오는데...
청살은 좀 다르다.
아직 보지 못한 에피소드들이 가득이지만,
오늘 드라마가 끝났어도 나는 여전히 그 에피소드들을 볼 것 같고...
그 인물들을 사랑하게 될 것 같고,
앞으로 2-3번은 더 볼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삶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너무 좋다.
어떻게 보면 내가 내 가난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지만,
청살의 매력은 그것이다.
정민과 무성의 에피소드에도 나온 말인데,
'웃프다'.
웃기고도 슬프다.

간혹 그런 생각이 든다.
가난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청살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들의 풍자를 보면서 잘 만든 드라마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가슴 절절히 이해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시작부터 <청담동 살아요>라는 드라마(시트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김혜자 님이 종편의 어떤 시트콤에 출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게 <청담동 살아요>인지는 몰랐다.
그러다 10아시아 등에서 <청담동 살아요>에 대한 리뷰를 보았다.
워낙 그 매체에 대한 신뢰가 강한지라... 무턱대고 꽤 괜찮은 드라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리고 2012년 5월 10일 111회를 보았다.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무사모'. 무섭게 생긴 사람들의 모임이다.
우현+상훈+무성 아저씨가 무사모에 나가고,
자기와 같이 무섭게 생겨서 생기는 고충들에 가슴 찡해하다가..
술에 취해 쇼윈도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험상 궂은 다른 사람들인줄 알고 대치를 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빵 터져버렸다.
진짜 많이 웃었지만, 생각할 수록 짠한 에피소드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날 또 다른 에피소드로 노안 때문에 돋보기를 쓰게 된 혜자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집안의 먼지들을 발견하면서,
때로는 모르고 사는 게, 보지 않고 사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부분도 의미 있게 느껴졌다.
더불어...(지금 생각해보니, 이 에피소드가 내게 종합선물세트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젊은 피.
현우 + 지은 + 상엽의 삼각관계까지.
상엽이 현우의 옛 연인 때문에 자신이 짝사랑하는 지은이 상처 받지 않을까
고군분트하는 모습이 아.직.은 20대인 내 가슴을 달달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삼각관계 로맨스도 있고, 삼인방의 블랙 코미디도 있고,
혜자 맘의 의미 있는 스토리도 있는 드라마.

나도 모르게 다음 날, 시간에 맞춰 방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에피소드가 대박!

112회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63세 혜자 : 혜자야, 너 왜 소리 안 내고 울어. 어린애는 소리내서 우는 거야. 엉엉. (...)
어린 혜자 : 근데 아줌만, 왜 아직도 여기에 자꾸 오세요?
63세 혜자 : 아무리 생각해도 넌 어린 나이에 겪지 말아야 할 일을 겪었어. 네가 저기 주저앉아서 왜 빨리 해가 안 지는 걸까. 빨리 빨리 뜨고 빨리 빨리 져서 빨리 늙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게,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어린 혜자 : (...) 아줌마. 내가 어려서 마음이 아팠던 건 사실이지만, 난 커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나이 들어서까지 이렇게 심장이 쪼그라든 채로 살고 싶진 않았어요.
63세 혜자 : (...)
어린 혜자 : 아줌마. 심호흡을 하세요. 후우.
63세 혜자 : 후우.
어린 혜자 : 그렇게 나를 몰아내세요.
63세 혜자 : 난 이제 괜찮아요. 이제 나를 내려놓으세요.


나는 이 에피소드에서, 청살과 사랑에 빠진 것 같다.
63세의 혜자와 어린 혜자가 만나는 그 장면.
혜자와 같은 슬픔과 고통을 겪지는 않았었지만, 그 시대를 경험하진 못했었지만, 누구에게나 '상처'라는 건 있는 거니까.

청살은 그렇게 내게 다가와 위로가 되었다.
내 잘 익어가고 있는 상처에...(요즘 상처 받고 있나?) 꽃 향기가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드라마가 되었다.
인물 구성 하나 하나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이 없다.

시인을 꿈꾸는 혜자 맘.
거짓말을 하면서도 누구보다 진실되고 아름다운 사람.
혜자 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29회 "어느 추운 날".
추운 겨울 날, 한 노숙자가 죽었고 그 소지품 속에서 상엽의 연락처가 적힌 오천원짜리 상품권이 발견되었다.
혜자 맘이 돈이 없어서 대신 주었던 상품권.
혜자 맘은 지폐가 없어서 상품권을 준 자신을 자책하면서, 편의점에 들어가서 잔돈을 바꾼다.
자신이 돈으로 줬으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면서.
그 모습을 본 모태 청담인인 상엽 역시 자신의 지갑에 잔돈을 채워 넣는다.
그 얼마나 따뜻한 에피소드인가.
단순히 스스로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 마음이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상만이 전부라 여기던 사람들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좋은 에피소드를 꺼내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혜자 맘이 시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은, 계속 나를 자극 시켰다.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고 싶다는 마음.

조금씩 부족한 인생인듯 보이나 꽉 찬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물이었던 지은이 멋진 남자 친구까지 생기고, 자신의 인생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면서도
열등감을 버리지 못한 것.
초라해지고 싶지 않아서... 뛰고 난 후 "나는 왕이다"를 외치던 그녀의 모습.
서울대에 잘나가는 성형외과 의사이지만, 기러기 아빠와 페이닥터로 살아가는 무성 쌤.
(솔직히 무성 쌤 에피소드 중에 너무 울컥 울컥한 거 많았었다)
그리고, 우리 우현 아저씨.
48회 "무슨 말을 하고 사십니까"
77회 "잃어버린 유산.. 행복"
102회 "감동에 솔직한 남자"편
정말 강추, 강추, 강추.
행복이라는 게 무언지 정말 우현 아저씨를 보면서, 많이 생각했었다.
상훈 아저씨도... 완전 좋아.
얼굴과 다르게 진짜 착한 캐릭터.
실제로도 정말 착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분이셨다.

상엽과 현우는.
뭐.
잘 생기고 멋있으니까.
하하하하.
라고 말하지만, 애정은 상엽 쪽에 살짝 더.
바람둥이가 나중에 사랑을 깨닫지만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의 연인이 되어 있고,
그 사랑을 지켜봐줘야 한다는 거.
식상한 스토리 구조이지만, 솔직히 설레기도 하고 찡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다 가지고 있는 현우보다는 다 가진 듯 보이지만 살짝 부족해보이는 상엽에게 더 애정이 갔던 게 사실이다.
상엽이라는 배우를 처음 봤는데,
아마 앞으로 눈여겨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쩔 수 없이 약간 능글맞은 사람을 좋아하나 보다.

정민 쉡은....정말... 최고.
말을 할 필요가 없고.. 캐릭터도 너무 좋았다.
(지금 캐릭터와 배우에 대한 감정이 뒤섞여서... 죽겠다.
이 드라마는 등장 인물과 배우의 이름이 같아서... 말하다 보니까 막 섞인다. 하하하!)

보희 배우와 조관우 매니저도 다 좋아.
심지어 개인 개똥이마저도... 사.랑.스.럽.다.
캐릭터들이 다 살아 있다.
역시 개똥이도.

오늘, <청담동 살아요>가 끝났다.
오늘도 위로 받았다.
어제도 위로 받았고.
지금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고,
과거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고,
미래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드라마가 있어서,
행복했고
아직도 볼 게 남아 있으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안녕.
<청담동 살아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