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05. 13 / 대학로 CGV

 

 

 

사실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이런 영화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친구가 갑자기 이 영화를 보고 싶은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제목에서 종교적인 냄새가 폴폴 나는 것 같아 살짝 걱정이 되어서, YES라고 대답을 하기 전 영화 정보를 찾아보았다.

종교와 관계 없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친구와 나는 영화관에서 만났다.

 

사실 영화는 정보 페이지에서 확인한 줄거리만으로도 충분히 스토리를 예측하게 했다.

눈이 멀어 자신에게 오는 편지에 답장을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게 유일한 낙인 야곱 신부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가 사면된 세상의 무엇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이미 삶을 포기해버린 듯한 여자. 그 여자가 신부 조수가 되어 편지를 읽어주고 대필해주는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신부가 하는 일이 의미 없다고 여겼지만, 편지가 오지 않게 되어 신부가 실의에 빠지자 그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하는데

솔직히 결말이 어느 정도는 예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기도 전 분명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유와 위로, 그리고 위안.

 

우리는 영화를 통해 그런 걸 바라게 되는 거니까.

참 간단하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나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는 생각했던 것만큼 조금은 루즈하다.

어제 피로했던 일정 때문에 조금은 하품이 나오기도 했고, 영화를 보자고 했던 친구도 살짝 졸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은 좋았다.

마지막 장면에 조금은 울었던 것 같다.

 

편지를 통해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눈 먼, 노 신부.

그 노 신부는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자 실의에 빠지게 되고, 결국 정신력이 약해져 버린다. 치매에 걸린 듯 착각을 하는 그 신부를 보면서 결국 그 편지로 인해 위로 받고 버틸 수 있었던 건 노 신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신부 역시 말한다.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그 편지들을 보내준 것이라고.

 

정신을 놓아버린 신부를 보면서, 그의 행동이 부질 없는 것이라 여겼던 그녀는 그곳을 떠나려 한다. 하지만 갈 곳이 없다.

결국 그곳에 남아 마지막 편지를 신부에게 읽어준다.

 

그녀는 묻는다 누가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언니의 남편을 죽인 그녀.

언니의 인생 조차 망쳐버렸다고 생각한 그녀.

그래서 언니에게 갈 수 없는 그녀.

 

있지도 않은 편지를 읽을 때 그녀가 흘리던 눈물.

나도 그 눈물에 함께 슬퍼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에서야 자신의 언니가 자신을 위해 야곱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왔다는 걸 알게 된다.

 

거창하게 죄를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거기까지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사람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신에게든, 그 누구에게든.)

 

영화를 보는 내내 <애도하는 사람>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다니는 남자.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알지도 못하는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고 다니는 한 남자.

죽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채,

그저 죽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사랑 받는 사람이었음을

그거 하나만을 믿으며 애도하던 그 사람이 생각났다.

사실, 그 소설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위로는, 내가 상대에게 건네는 순간,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그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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