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04. 11 / 서울극장

 

사실 <인류 멸망 보고서>를 볼 생각은 아니었다. 원래는 조조 영화로 <건축학 개론>을 보려고 했는데인연이 닿지 않는 것인지 자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오늘도 약간의 늦잠으로 <건축학 개론>의 시간을 맞추지 못했고, 결국 시간이 딱 맞아 떨어지는 <인류멸망보고서>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영화관에 갔다가 <인류멸망보고서>의 포스터를 보고 살짝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전에도 김지운 감독의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독 이름에 따른 호기심 내지는 궁금함이 있었다. 포스터만 봤을 때는 사실… B급 정서를 담은 영화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판타지나 SF라는 것이 우리 나라에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정서는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나름 좋아했으나…. 관객들에게 엄청난 외면을 받아야 했던 <내츄럴 시티>만 봐도 그렇고.

 

그래서 과연 이 영화를 내가 좋아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됐고, 과연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를 선택할까 라는 걱정도 됐다. 그렇게 들어선 영화관. 아주 작은 상영관이었는데, 나는 행여나 혹시나 나 혼자 이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관객들이 꽤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름 충격이었던 것은 선거일이라서 그런지 애들과 함께 온 가족 단위의 관객이나 중년층 이상의 관객이 많았다는 것. 연세가 깨나 있으신 분들이나 초등학생 미만의 아이들이 과연 이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 영화를 잘 못 판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인류멸망보고서>라는 타이틀이 흐르고 난 후, ‘멋진 신세계라는 소 타이틀이 뜨고 한쪽에 감독 임필성라는 자막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이 영화가 옴니버스 형식인 것을 알았다. 사실 영화를 보러 들어가서도 나는 이 영화가 김지운 감독의 장편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나는 그저 대박이라는 두 글자를 외쳤을 뿐이다.

 

 

 

이야기 하나. ‘멋진 신세계

일단 밝혀두자면 나는 좀비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좀비나 호러 영화를 싫어한다. 하지만 그런 내가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좋았던 영화를 꼽아보자면 바로 이 멋진 신세계. 사회적인 비판과 웃음 코드가 잘 믹스되어 있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사료로 만들고, 그 사료를 먹은 소가 도축되고, 인간은 바이러스에 걸려 좀비가 된다. 황당무계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우리가 뉴스에서 봐오던 이야기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성욕과 폭력성을 드러내며 좀비가 되어 간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90분 토론과 종교, 사회 각층을 대변하는 대사들. 솔직히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일 수 있겠지만, 눈 감아서는 안 되는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부분이 아닐까. 웃으며 영화를 봤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육식을 굉장히 좋아하는 내가, 강하게 고기를 끊지는 못해도 좀 줄여볼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그것이야 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블랙 코미디와 류승범, 고준희라는 배우의 열연이 돋보였고, 고창석 등 감초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좀비 영화였지만 현실과 어우러져 시사하는 바가 컸던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이야기 둘. ‘천상의 피조물

이 영화가 바로 김지운 감독의 작품이었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부처로 여겨지는 로봇과 그 로봇을 해체하려는 기업의 이야기를 다룬 천상의 피조물’. 아마도 원작이 있는 영화인 듯 싶다. 로봇의 목소리를 박해일이 연기했고, 그 로봇의 상태를 파악해야 하는 기술자를 김강우가 연기했다. 그리고 그 기업의 총수를 송영창 배우가 연기했다. 기업의 총수는 로봇으로 먹고 살면서도 자신들이 만든 로봇이 의지를 갖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로봇을 해체할 것을 명령한다. 사실 영상미는 훌륭했고, 의미하는 바도 컸으나 사실 말이 너무 많은 영화였다. 로봇이 의지를 갖게 된 것에 대해 논쟁을 할 때에는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종교에서부터 시작해 지배와 피지배에 관한 이야기로까지 확대되는 이야기.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꼭꼭 씹어서 다시 한번 머리에 넣어 놓고 싶어지는 영화였다.

 

 

 

 

이야기 셋. ‘해피버스데이

너무 유쾌했다. 지구가 행성 충돌에 의해 멸망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 반공호를 지어 피신하는 초등학생인 민서네 가족. 민서는 텔레비전으로 그 행성의 모양을 보다가, 그것이 지구로 날라오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누군가는 너무나 황당무계한 설정이라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민서와 그 행성의 상관관계가 너무나 기발하게 느껴졌다. 사실 지구 멸망이라는 건 어쩌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 한 번은 그래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게 아닐까.”라는 대사처럼 이 지구가 너무 썩어서 한 번은 그렇게 다시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뿐일지도 모른다. 결국 모두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일 뿐이니까. 종말론자는 아니지만 가끔 때때로 이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연 재해와 사건 사고들을 보고 있으면 뭔가 잘못 되어 간다는 생각과 함께 무서워진다. 어떻게 해도 좋아지는 게 아니라 결국은 더욱 더 나빠질 것이라는 생각. 희망은 없고,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속도를 늦추는 것뿐 결국 한번은 모든 게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 내가 너무 우울할 미래를 보는 것일 수도 있다. 단 기간은 아니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아닐 테지만 나는 언젠가는 세상이 미쳐갈 것만 같아서 무섭다. 그러니 이 영화가 내게 더 다가올 수밖에.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지금 삶이 핑크빛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위험 신호, 혹은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나는 <인류멸망보고서>가 참 좋았다.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두둥.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찾아본 감상평에는 대부분이 혹평이었다. 나는 특히나 임필성 감독의 작품이 좋았는데, 다른 이들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에만 So So의 평을 주고 나머지에는 굉장히 불만족스러움을 표했다. 여기서 나는 또 혼란. 내 취향이 이상한 것인지. 물론 마니악할 수 있는 영화였고,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불편할 수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혹평을 들을 정도로 나빴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르의 다양성과 시선의 다양성이 조금은 더 인정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좋았으나, 나만 좋아해서조금은 서글픈 영화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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