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시: 2009년 7월 11일(토)
공연장: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작: 사카테요지
연출: 김광보

지난달에 ‘히키코모리’라는 소재의 <다락방>이란 연극을 보러간 극장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원제_오뚝이 아저씨 자빠졌다>라는 작품을 알게 되었다. 두 개 모두 한 일본 작가의 작품이었다. 아르코예술극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카테 요지 페스티벌. <다락방>을 매우 재미있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지뢰와 반전(反戰)을 이야기한다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그리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히키코모리’라는 사회 현상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끼면서도, ‘반전’이라는 소재에는 눈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전 웹서핑을 하다가 발견한 기사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배우 정규수 아저씨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재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거부감 보다 정규수에 대한 끌림이 더욱 강했고, 결국 나는 또 예매를 해버리고 말았다.


<다락방>에서의 무대(공간) 연출에도 깜짝 놀랐지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무대 뒤로는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직사각형의 모래밭(?)만 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모래밭은 때로는 이라크가 되었고, 때로는 일반 가정집이 되었다. 스크린에는 매 에피소드마다의 제목이 떠올랐다. <자이툰 부대 1> <가족 1> <보스 1> <의족 여자 1> 등으로.

각각의 에피소드는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락방>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다락방> 만큼의 긴밀함은 잘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초반에는 단편적인 이야기들로 하여금 조금 지루한 감도 있었다. 감정 이입을 할 틈도 없었으며, 이야기가 진행될 만하면 다른 에피소드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연기에 있어서도 <다락방>의 배우들보다는 편차가 좀 있었던 것 같다. <다락방>의 경우에는 어느 배우가 특히 잘하고, 어느 배우가 특히 못한다는 느낌 없이 모두 잘 어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는 강렬한 포스를 풍기는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와 포스가 약한 배우가 존재했다.

그렇다고 연극이 재미가 없었냐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이 작품의 힘은 연극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나오는 것 같았다. 중반을 지나 에피소드들이 점점 하나의 줄기로 모아지면서, 배우들의 연기에 물이 오르면서 초반의 지루함과 약간의 불만족은 환희로 변하게 된다.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의족 여자>. <의족 여자>의 경우 반전, 지뢰를 소재로 한 로맨스물, 멜로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의족 여자와 회장님의 경호를 위해 지뢰를 구해야만 하는 조폭의 사랑이야기. (어쩔 수 없이 반전, 혹은 지뢰에 대한 소재에는 처음부터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끝끝내 다른 측면에서 이 연극에 감동해버리고 말았다.)

<의족 여자>의 에피소드는 세 번으로 나누어 등장하는데, 매번 나올 때마다 달라지는 상황, 그리고 그 감정들. <의족 여자 1>은 그저, 여배우가 장영남을 닮았다는 생각만이 들었을 뿐이었다. 장영남 언니보다는 목소리가 좀 굵기는 했지만 웃음 소리는 매우 유사했다. 그래서 관심을 가졌는데 <의족 여자 2>에서부터 ‘장영남’이 아닌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뢰한테는 특별한 순간이 있어. 그걸 발견했어.
살아있는 존재와 죽은 존재가 이어지는 순간.
과거도 미래도 어쩌면, 그 순간 우주가 하나란 걸 깨닫지.

<의족 여자 2>은 지뢰 철거를 하러 다녀온 그녀와 조폭남의 두 번째 만남을 그리고 있다. 지뢰를 5천 개 제거할 때마다 철거대원이 한 명 씩 죽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5천 명 중에 한 명이 되었다. 물론 죽지는 않았기에 그의 앞에 나타날 수 있었지만.

다신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그는 ‘당신은 그럴 수 있냐’고 묻는다. 여자는 말한다. 그런 말로 마음을 흔들지 말라고, 쫓아가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냐면서. 팔도 다리도 없는 몸으로 막 기면서...

어찌 이런 대사를 들으면서 울지 않을 수 있을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내밀어지는 가짜 팔. 무대 위로 떨어지는 그녀의 눈물.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는 한 남자.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로부터 시작되다. 그녀는 거의 사이보그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그는 감싸 안는다. 감동 받아도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그녀를. 부끄러운데 부끄럽게 보일 줄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그녀를.

<의족 여자>는 정말 내용과 연기가 최고로 이뤄진 에피소드였다. 물론 지뢰와 반전을 소재로 하면서 침묵하는 아버지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가정에 대한 현실을 보여주면서, 묻지마 살인 등의 사회문제까지 건들여 준 <가족>도 좋았다. 

반전을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연극은 꽤나 좌파(이런 식의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부시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 나온다거나, 고어를 열창(까지는 아니지만) 하기도 하고, (실명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대통령(일본의 작품을 한국 식으로 번안했기 때문에)의 이야기가 나올 땐 배우가 침을 뱉기도 한다.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작품. 모든 사람을 아우르기에는 힘든 작품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민감한 사회적ㆍ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연극의 존재가 반갑기도 했다. 그 사회적ㆍ정치적 이슈를 바라보고 싶지 않아서 이 연극을 회피하려고 했던 내 자신이 조금은 반성될 정도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뢰나 전쟁에 대한 것보다는 의족 여자에서의 사랑 이야기에 더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게 나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프로그램을 절대로 사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저번에 샀던 <다락방>의 프로그램의 내용이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또 프로그램을 사는 곳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게 되었다. 게다가 사카테 요지의 희곡집까지 눈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데... 이 고민과 번뇌란.

요즘 나의 형편으로는 돈 천원이 아쉬운 판인데,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은 프로그램과 희곡집을 모두 사고야 말았다. <다락방>의 경우에는 연출도 사카테 요지였으며, 작품도 일본을 배경으로 했다. 하지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한국의 상황에 맞게 번안되었으며 (분명 일본을 배경으로 한 희곡이 한국의 실정과 이토록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도 일종의 놀라움이다) 연출도 한국인이 했다.

희곡집을 읽어본 결과 연출이 희곡에 비해 훨씬 재미있게 된 것 같다. 이라크 공항 에피소드 등에서 배우들의 여러 외국 사람의 연기를 하는 장면은 매우 재미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도 좋았는데, 마지막 의족 여자의 대사는 희곡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 마지막 대사가 참 마음에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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