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읽지 않은 책이기에 '지껄이기'에 끄적여야 할지, '작은서점'에 끄적여야 할지
살짝 고민을 했다.
근데, 그냥.
'앞으로 읽으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이곳에 남긴다.
<표백>에 관한 내용은 한줄도 없음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컴퓨터를 정리하다 '타이밍 리'라고 되어 있는 메모장을 하나 발견했다.
뭘까, 하고 열어보니.
제16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 <표백>의 장강명 작가의 글(?)이었다.

그러자 문득 기억이 났다.
친구가 앞뒤 없이 네이트온에 툭 던져 놓았던 저 길고도 길었던 글.
어디서 발췌한 글인지 그 출처는 알 수 없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꽤나 자극이 되었다.
글을 읽으면서 나의 나태함을 반성하기도 하고.
(물론 곧 잊어버렸다는 문제가 있지만)
글을 보내준 벗에게 타이밍 하나 죽인다면서, 그 글을 복사해 메모장에 붙여 넣은 뒤
'타이밍 리'라는 제목으로 저장을 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가 한겨레 문학상에서 수상을 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지만,
그것보다 반성해야 할 내 모습이 거울에 비춰진 듯 마음이 참 많이 쓰라렸다.
뭐, 그 후로도 '노력'이라는 건 잘 하지 않지만.
오래간만에 꺼내본 이 글을 잊지 않고 싶어서.
그리고, <표백>은 조만간 읽지. 뭐.

* 아래는 친구가 네톤으로 전해줘 내 메모장에 저장되었던 강장명 작가의 글이다.


"시간을 어떻게 냈어요?"

한겨레문학상 당선 이후 후배들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마음이 반으로 갈렸다.
"운이 좋아서"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반이고, "결국 시간 다 나게 되더라"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두 가지 대답이 다 맞다.

운이 좋았다는 측면에서는 우선, 아이가 없다는 점이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유리했던 점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아이가 생기면 과연 글 쓸 시간이 있을까에 대해 나는 지금도 다소 회의적이다.

입사 전부터 한 애인을 계속 사귀어오고 있는 것도 시간을 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아무래도 새로 이성 친구를 사귈 때에는 주말에 시간을 내기가 어렵지 않을까.
특히 내 경우에는 애인이 3년간 호주로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그 기간에 매 주말마다 달리 할 일이 거의 없었다.

나머지는 '시간은 결국 나게 돼 있다'에 관한 얘기들이다.
그 정도 시간은 낼 수 있고, 꾸준히 하면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식의 얘기가 아니라, 막상 해보면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나는 취미도 여러 가지다.
마라톤도 하고, 알토 색소폰도 불고, 영화도 1년에 수십 편씩 보고, 한 시즌 이상을 다 본 미국 드라마도 여러 편이다.
주말에 빈둥빈둥 웹 서핑하거나 그것도 안 하고 멍하니 보내는 시간도 많다.
글쓰기를 포함해 여러 취미 생활 중 특별히 휴식 시간을 축내거나 잠을 줄이면서까지 열심히 한 것은 없었다.

색소폰을 배우면서 평소 거의 연습을 안 하고 주말에만 학원에 가서 레슨을 받았다.
레슨 시간이 연습 시간의 전부였던 만큼 당연히 실력이 늘지 않았고, 매번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어느 날 하도 부끄러운 마음에 "제가 배우는 속도가 좀 늦죠, 제 실력이 지금 어느 정도나 되는 수준입니까"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지금 우리 학원에서 색소폰 배우는 사회인이 모두 6명인데 그 중 장강명 씨가 제일 잘한다"며 "취미로 색소폰 배우는 사람 중에 장강명 씨처럼 2, 3년 넘게 학원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대답했다.

글쓰기도 색소폰을 배우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 '장편소설을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2006년 정치부에 있을 때였다.
여당팀 말진은 바쁘다.
아침 일찍 출근해 조찬 간담회나 당정협의를 챙겨야 하고, 시내판 마감 때까지 기자실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잦다.
그러니 글은 거의 주말에만 쓸 수 있었는데, 그래도 약 1년 만에 장편소설 하나를 쓸 수 있었다.

이게 대단한 속도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토요일에만 200자 원고지 20매씩 쓴다 해도 채 1년이 되기 전에 장편소설 한 권(200자 원고지 1000매) 분량이 된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소설 문장을 쓰는 것이 기사를 쓰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신문 기사만큼 압축적이고 밀도가 높은 글은 거의 없다. ‘
한 4, 5매 정도 되는 분량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머리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풀어나가면 예상보다 훨씬 양이 많았다.
하루에 원고지 50매 분량을 쓴 적도 있었다.
게다가 전업 작가라면 따로 발품을 들여야 했을 취재 과정이 필요 없었다는 장점도 있었다.

내 경우 입사 뒤 처음으로 썼던 장편소설의 주인공은 사회부 기자였고,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대학생, 고시생, 정부 부처 공무원, 주간지 기자 등이었다.
그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었기에 글을 쓰는 데에만 집중하면 됐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전업 작가의 길로 나선 문학도가 문장미(文章美) 등에 있어서 더 나은 점이 있겠지만, 기자는 기자 나름대로 유리한 점이 있지 않을까.
 
2006년에 시도했던 첫 번째 장편소설은 다 쓰고 나니 너무 엉망이어서 어디에 응모할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글쓰기를 멈추지는 않았고, 이후 3년 동안 두 편의 장편소설을 더 썼다.
어느 한 편을 먼저 쓴 게 아니라 두 편을 동시에 썼는데 그 중 한 편은 한겨레문학상에 당선됐고, 다른 한 편은 조선일보 판타지문학상 본심에 올랐다
년여 동안 장편소설 3편을 썼고, 5년째 정식 등단을 하게 된 셈이다. '가늘고 길게'라는 모토로 꾸준히 쓴 결과였다.

4, 5년이라는 시간의 길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짧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는 짧다고 보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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