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리아는 과연 유토피아인가

Ⅰ.서론

<20세기 소년 소녀 창가집>이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다. 연극의 주인공인 어린 미도리는 말한다. “멋진 뱃사람이 될 거에요”라고 말이다. 그러나 여자아이인 미도리에게 아무도 뱃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미도리의 가장 큰 꿈은 남자가 되는 것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그 연극의 미도리가 생각이 났다. 작품 속 페트리니우스와 너무나 닮은 모습에 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연극 속 ‘미도리’ 세상 속 여성이며, 작품 속 ‘페트리니우스’는 픽션 속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연극 속 ‘미도리’는 여성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일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미도리가 느끼는 감정을 느껴보지 않은 한국여성은 없을 것이며, 그것은 세계 속에서 마찬가지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해왔다. 그런데 조금만 살펴보면 남녀의 차이에 대한 설명들은 대부분 남성이 주도해왔고, 여성의 열등성을 공공연히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서 이래로 서구 문화는 오랫동안 ‘인간’으로서의 남성과 ‘모자란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상징했다. 사회는 ‘다움’이라는 말들로 여성을, 그리고 남성을 억압해왔고, 그 억압의 주 대상은 언제나 여성이 되어 왔다는 말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여성이 뱃사람이 된다고 한다면, 아직까지도 “인생에는 참아야만 하는 것이 있는 법이야.”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이 세상을 뒤집어 보고 있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바꿔 보는 이 작품 속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당혹감 혹은 통쾌함을, 그리고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지금부터 작품 속에서 보이는 성에 관한 다양한 담론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억압의 기원, ‘성’과 ‘계급’이란 무엇인가?

‘이갈리아’라는 가상의 나라. 그 나라에서 항상 약자는 ‘남성’이다. 밖에서 사회의 주축을 이루면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움’은 여성이고, 집에서 가사를 책임지고 순종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맨움’은 남성을 말한다.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아니 반대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머릿속에는 나름의 궁금증이 생겼다.

현실에서 여성이 약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성과 남성의 선천적인 생물학적 차이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물학적 차이는 ‘권력’과 관계를 맺게 된다. 젠더 관계는 권력이 사용되는 주요 영역은 하나인데, 권력을 타인의 의사에 반하여 그 사람을 강제할 수 있는 힘으로 정의하는 한, 여성은 지금까지 권력을 행사한 적도 없었고 언제나 권력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작품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성역할이 바뀌어버린 세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과연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를 인정하면서 여성이 강자인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은 노총각 선생님 올모스의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었다. 어느 쪽이 약자이고 강자이고를 묻는 학생 판당고의 말에 올모스는 당당하게 ‘움’이라고 대답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을 강한 성으로 만든 것은 ‘문명’이라며 그것이야말로 ‘문명의 특성’이라고 말한다.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약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명은 여성을 지배계층으로 만든 것이다. 문명은 여성을 지배 계층으로 만들었고, 지배계층이 된 여성은 권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권력을 갖게 된 여성은 언제나 ‘강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실에서는 단순히 남성들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생물학적 차이를 근거로 들고 있다. 현실에서 남성들이 권력을 갖고 있었으며, 때문에 대상으로 여성을 약자로 삼고, 그것을 생물학적 열등함으로 스스로 결론지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보면 그것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하나의 핑계에 불과하며, 사회적으로 형성된 권력일 뿐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여성은 신체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강함’을 여성‘다움’으로 만들었고, 권력을 손에 넣고 지배층이 되었다. 그리고 ‘움’들은 자신들은 생물학적 차이(힘의 약함)는 맨움들은 눈치조차 챌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버렸고, 오히려 자신들의 생물학적 차이를 더욱 우월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성차와 이에 따른 차별은 누가 권력을 지니고 있느냐의 문제로 변화되며, 이에 따라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구분되게 된다. 올모스 선생은 아이들에게 자연의 불공평함에 대해 가르치며 자연의 불공평을 치유하는 것이 모든 문명의 임무라고 말한다. 「자연의 불평등함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한다는 사실에 있어요.…그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며 가장 강한 자가 항상 승리하고 가장 약한 자는 항상 굶주리거나 죽게 됩니다. 물론, 이제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명이라는 것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도나 제시카 213년 이래 과학자들은 모든 자연의 불공평한 측면들을 밝히기 위해 연구해 오고 있어요. 이것은 억압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매우 복잡한 영역의 연구입니다.(P.25)」이 작품에서 문명이라는 말은 권력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게 된다. 문명을 만드는 주 성별에 따라 자연의 불평등함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실의 여성도 남성이 주도권을 잡은 문명 속에서 항상 부당한 권력의 대상이 되어 왔다.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히 여기게 됐고, 남성 역시 여성 지배를 당연히 생각해 오게 된 것이다. 어떤 성이든 권력을 갖게 된 기득권층은 상대를 억압하게 된다. 「미안하지만, 페트로니우스, 그러나 그건 정말 생각할 수도 없어. 네가 나를 보수적이라고 보는 것은 옳아. 그리고 나는 권력 관계를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유지하고 싶단다....왜냐하면...왜냐하면, 음, 나는 내 자신이 권력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지.」이와 같은 여성장관 브램의 말은 권력을 가진 기득권층이 피지배계층에게 얼마나 수동적인 자세를 요구하고 그런 사회구조가 유지되기를 바라는지 잘 보여준다.

현실에서 여성의 불평등이 기득권인 남성들이 갖는 권력의 힘 때문임을, 그러나 그 권력은 정당하게 얻은 것이 아니라 그저 사회가 만들어 낸 것임을 인정하고, 인간으로서 그 권력을 나누고자 하며, 여성 역시 그 사실을 자각 하는 것에 힘 써야할 것이다. 작품은 말하고 있다.

2. 남자‘다움’ VS 여자‘다움’, 그 의미는?

어렸을 적부터 우리는 ‘여자답게’ ‘남자답게’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여자아기가 태어나면 분홍색 옷을 입혔고, 남자아기가 태어나면 파란색 옷을 입혔다. '여자가 얌전해야지,’ ‘남자가 울면 안돼’라는 말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갈리아’에서는 ‘맨움’이 힘이 센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이 최고의 남성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움’은 씩씩하며 활발해야만 한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해왔던 사소하지만 수많은 불평등들이 사회가 만들어 낸 ‘다움’이라는 말로 ‘여성’을 억압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보면 남성의 성기를 가리는 페호가 나온다. 메이도터는 잠수복에 달린 페호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페호가 달려있지. 안다구. 어리석긴. 옛날에 럭스에서는 맨움들이 페호 따위는 입지 않았어. 그것은 근대의 산물이야. 상류 계층의 고안물이라구. 그런데 지금은 사회의 전계층으로 퍼졌지. 나에게 너는 페호를 하건 하지 않건 언제나 사랑스러워.(P.157)」이것을 보면서 여성의 브래지어가 생각이 났다. 2004년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에 가서 이유명호 한의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브래지어가 여성의 신체에 얼마나 좋지 않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가슴을 받쳐주는 기능성 속옷이라고는 하지만 왜 그런 철심을 여성의 몸에 지니고 있어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다. 더불어 “여성이여, 제모를 하지 말자”라는 주장을 들은 적이 있다. 이갈리아의 ‘맨움’들이 많은 털을 부끄러워했듯이 현실에 여성들도 털이 난 것을 부끄러워 한다. 특히 여름철이면 각종 제모 용품들이 넘쳐나며, 여성에게는 털이 없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이 여성‘다운’ 것처럼 여기게끔 만든다.

성별에 대한 ‘인식’은 어렸을 때부터 학습되고, 사회화된다. ‘사회화된 성’의 둘레에서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어서도 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도 보여지는 성별에 따른 특성 역시 사회적으로 습득된다. 성별에 대한 인식이 교육되고 세상속에 ‘사회화’되어 나타난다. 성별에 따른 차이, ‘다움’은 ‘사회화된 성’으로 그저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 ‘사회화된 성’을 가르치는 것을 지양하고 스스로도 이에 대한 자각을 갖추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더불어 사소하게 여겨지는, 이미 문화 깊숙한 곳에 뿌리 박혀 성차별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것들이 있다. 언어적인 측면에서도 「응, 하지만 휴움조차도 움이라는 뜻의 고대어 우모(womo)에서 나온 말이야. 우모 사피엔스(womo sapiens)처럼. 그것이 휴우미타스(huwomitas)라는 말의 어근이야. 올모스가 우리들에게 이 단어들의 어원을 말해 줬어. 그건 정말 재미있어.(P.193)」라는 판당고의 말처럼 말이다. 우리는 남의사라는 말은 없지만 여의사라는 말은 존재하면, 남검사라는 말은 없지만 여검사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는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소소하게 얼마나 여성을 남성 속에 종속시키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영어의 여성이 우먼인 것처럼, 그리고 독일의 언어에 조차 성별을 두어 별로 좋지 않은 것들에게 ‘여성’이라는 성을 붙이는 것처럼, 언어적인 차별 역시 국경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고 있다. 여성들조차 자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회화된 성’을 그 성별이 가지고 있는 본질인냥 생각지 말며, 너무나 익숙해져 인습이 되어버린 것들을 인식하고 변화시켜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3. 동성 간의 연대, 그 따뜻함이 필요하다.

작품을 보면 팔루리안(Phallurian)에 대해 나온다. 맨움 동성애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다보면, 여성의 페미니즘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나갔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맨움 동성애자, 팔루리안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떠올리게 했다. 레즈비언 페미니즘(Lesbian feminism)은 정치적ㆍ성적ㆍ경제적 지원을 원코자 동참한 여성과 동일시하는 여성들이, 레즈비언들에게 억압이라 여겨지는 남성/여성 관계에 대한 대안적 모델을 제시한다는 신념을 칭한다. 솔직히 나는 판당고와 올모스의 관계을 봤을 때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옴’으에게 당하는 억압으로부터 연대를 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것이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서는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실 속에서 남성을 배제시킨 채, 여성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관계라면 그것은 정당할 수 없다고 본다. 하지만 성에 있어 여성과 남성을 구분 짓지 않기 위함의 동성애, 그리고 마음속에서 진실된 사랑이라면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다면 너무나 감성적인 것일까.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영상물에서 왜곡된 여성상, 남성상을 그리고 있으면서, 여성의 적을 여성으로 만들어 놓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레즈비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성들의 연대가 더더욱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든다. 나 역시 태어나서 지금까지 스스로가 약자의 입장에 처해있다든지, 혹은 차별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사회에서 여성으로 약자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지금도 비정규직 여승무원들을 비롯한 가정폭력 대상자, 성매매 여성, 여성 빈곤층 등 많은 약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에게 같은 여성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절대 해결되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이를 인식하고 따뜻한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여성공동체가 마련되어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4. 이갈리아는 과연 유토피아인가?

이 소설을 보면서 가부장 사회와 반대가 되는 ‘모계 사회(Matriarchy)’가 떠올랐다. 어머니들이 지도자이고 여성이 가문의 계보를 주도하는 형태의 사회인 모계 사회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모성 에너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힘이 사회적으로 결속력이 된다고 가정한다. 페미니스트들은 대부분 모계사회를 유토피아처럼 설명해왔다. 그러나 과연 모계 사회가 유토피아이며 가장 이상향적인 사회일까. 여성이 지배하고 있는 ‘이갈리아’는 과연 행복해보였는가. 여성인 내가 봤을 때 나는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흔들 수는 없었다. 그것이 통쾌함에서 쓸쓸함으로 책을 읽는 느낌이 바뀐 이유일 것이다. 여성이 지배자, 남성이 피지배자가 되는 세상.

그 세상 속에서 약자가 된 맨움들은 해방운동을 펼치며 움들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다. 여성과 남성은 그렇게 현실과 소설 속에서처럼 양립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인가. 어느 한 성이 지배계급, 기득권, 다른 한 성이 피지배계급, 약자가 되야만 하는 것 인다. 그렇다면 절대 행복이라는 것은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 반대성에 대한 반감이 모든 일에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이지만, 남성과 여성을 떠나 한 인격체가 인간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 양성이 양립하며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바뀐 이갈리아에서도 불평등의 문제는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 두 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이 문제인 것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담담하게 역할을 바꿔 현실의 모습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Ⅲ.맺음말

이 작품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수동적이라구! 너는 그게 움에게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니? 우리도 역시 수줍움을 타고, 대화를 주도적으로 하는 것이 힘든 움도 생각보다 많다구.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 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냐. 이성에게 거절당하는 게 맨움만은 아니라구. 움 역시 자기가 실패자라는 것을 느낀단 말야.(P.284)」라는 말처럼 ‘다움’이라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치관일 뿐이며, 그것에 맞춰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남성과 여성이 고통받았는지 말이다. 현실 속에서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던 남성들과 아름다움만이 최고의 가치로 받아지며 얌전해야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야 했던 여성들. 사회화 된 성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들의 자각이 그 두 번째이다. 여성은 자신들이 받아오는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성들은 자신들이 부여받은 권력이 여성과의 생물학적인 성차로 인한 당연한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여성과 남성, 성을 결정되는 권력의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서로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맨움들이 항상 묵인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야. … 맨움들은 무수한 저항을 했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맨움이 권력을 쥐었던 사회가 있었지. 문제는 우리가 모권제 사회에 살기 때문에 그런 저항이나 가부장적 사회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다는 거야. 역사가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쓰지 않지. 역사가들은 움들이니까. 인류학자들 또한 아무것도 쓰지 않지. 인류학자들도 움이니까. 그게 이유야.… 노동자 계급이 억압받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보다 맨움이 억압받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훨씬 더 지독하고 극단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성적 억압이 계급 억압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극심하기 때문일거야. (P.228)」」

소리 없던 여성들이 소리를 내 그 수많은 저항을 시도 했던 나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쓰는 남성들, 사회 기득권인 남성들에 의해 묻혀버린 그 저항의 소리들. 그 소리들을 이제는 찾아줘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여성들의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남성들의 시선 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더 이상 암탉이 울면 망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 나란히 지붕위에 올라가 있는 암탉과 수탉의 울음소리를 함께 들어보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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